내 모습이 못마땅해 벗어나고 싶은 그대에게
일 년 전, 시작은 '깃털'이었다. 작품이 주는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감상문을 남기고 싶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무작정 쓰다 보니 독특한 형식의 글이 완성됐다. 독후 소감과 내 일상, 그리고 상상력이 뒤섞여 세상 어디에도 없는 형식의 글이 뚝딱 만들어졌다.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휘리릭 단숨에 써진 글이었다. 글 쓰는 재미와 희열을 오랜만에 느끼면서 계획을 세웠다. '그래, '대성당'에 실린 작품, 열두 편 모두를 이런 식으로 실험해 보자!' 이렇게 해서 독후감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단편도 아닌, 그렇지만 이 모두가 될 수 있는 글이 세상에 나왔다.
처음에는 그냥 손가락을 놀리기만 해도 글이 저절로 써졌다. 머릿속 공상이 글자가 되어 톡톡 튀어나왔다. 이대로만 간다면 열두 편의 독후 실험 글이 앞다투어 줄을 서겠구나 싶어 자만할 정도였다. 분명 그랬는데.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머릿속에서 즐겁게 놀던 공상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공상은 더 깊이 숨어버렸다. 이상한 독후감의 시작은 단순히 글쓰기 연습을 위해서였다. 독후감 열두 편을 완성하고 나면 다른 소재로 글을 쓰리라,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글쓰기는 대성당 독후감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하면서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이 여느 때처럼 쌓여 갔고, 계획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데서 오는 찜찜함이 한 번씩 내 가슴을 주먹질했다. 퍽퍽! 아야, 아프다. '대성당'이 나를 괴롭혔다.
올해 초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결심과 새출발을 보너스로 주는 새해 특수 효과를 놓칠 수 없었다. 두 달 만에 반드시 이상한 독후감 프로젝트를 끝내고, 열심히 글쓰기를 연마하는 한 해를 살겠다고 다짐했다. 새해의 마법 가루가 뿌려지자, 궁금했던지 꼭꼭 숨었던 공상이 고개를 살며시 내밀었다. 이 녀석을 완전히 밖으로 끌어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어르고 달래며 놀게 했다. 이상한 독후감이 다시 한 편 두 편 줄을 섰다.
그런데, 또다시! 멈춰 버렸다. 내 변덕의 원인을 헤아릴 길이 없다. 마지막 한 편을 앞두고 다시 온갖 핑계를 대며 글쓰기를 외면했다. 영어 원서 북클럽 리더로서 바쁘잖아, 올해부터는 한국 책을 많이 읽을 테야, 아파서 잠을 설쳤던 한 달, 무조건 푹 쉬어야 낫지, 내가 회복하니 가족들이 또 아프구나, 간호하느라 피곤했던 몇 주, 향수병이 나를 덮쳤어, 그냥 슬퍼할래, 그래도 봄은 오고, 마음에 쨍한 햇볕이 드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날들, 꽃구경하러 가야지.... 글쓰기를 미룬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며 이렇게 또 줄줄이 읊고 있는 나. 도대체 이 미루기 굴레를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 '대성당 독후감 프로젝트‘를 끝내고 말리라! 그래서, 마지막 단편 '굴레'를 손에 들었다.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끝내지 못하고 던져버린 단편이다. 무척 좋아했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톡톡 자판을 두드릴게. 공상아, 숨지 말고 나와서 제발 알려줘!
'굴레'에는 굴레를 쓰고 있는 두 여자, 베티와 마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애초에 그들이 굴레를 쓰게 된 게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지만, 굴레를 쓰기로 결정했을 때 이들이 상상했던 미래는 분명 따뜻하고 환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남편이 부른다.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시간이다. 공상아, 잠시 기다려. 햇볕 좀 쬐고 올게.
"오늘 오전에는 뭐 했어?"
남편이 다정하게 물었다.
"대성당 프로젝트 있잖아. 아직 그걸 끝내지 못했거든. 딱 한 편 남겨 놓고 계속 미뤄 왔어. 오늘 기필코 끝내려고 해!"
"대성당에서 어떤 작품?"
남편이 호기심을 보였다.
"굴레"
"굴레? 그 작품은 당신이 처음 언급하는 것 같은데?"
내가 독후감을 쓸 때마다 남편을 괴롭혔기 때문에 남편이 '대성당'에 실린 작품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아, 굴레는 내가 당신에게 얘기해준 적이 없었구나."
"어떤 이야기야?"
"듣고 싶어? 좀 긴 이야기인데, 지루하지 않겠어?"
"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건 아니야. 그럼 간단하게 줄여볼게."
영어로 줄거리를 요약하려면 머리를 두 배로 굴려야 해서 힘들지만, 남편이 듣고 싶어 하니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베티와 마지. 중년으로 짐작되는 마지는 소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남편과 함께 관리인으로 일해. 입주자들이 단기로 사는, 수영장 딸린 작은 아파트 단지 있잖아. 마지의 남편은 잔디도 깎고 고장 난 물건도 고치고, 그런 소소한 일을 하는데, 바깥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TV 앞에 앉아서 TV만 봐. 남들 일에 관심도 없고, 마지 말도 잘 들어주지 않아. 지루하고 배려 없는 사람이야."
"도대체 대성당에 등장하는 남편들은 왜 다 그 모양이야?"
남편이 흥분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마지는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사는 여자야. 지루한 공간에 갇혀 살지만, 자신을 헤어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해. 거실 한편에 미용 공간을 마련해 놓고 고객의 머리를 손질해 줘. 어느 날, 베티 가족이 아파트에 입주하러 왔어. 베티의 가족은 미네소타에서 농사를 지었어. 땅도 있고, 가축도 있고,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베티의 남편이 말에 꽂혀버렸어. 말을 사서 경마에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경마에서 계속 지고, 그러다가 전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어. 쫄딱 망한 후에 미네소타에서 왜 애리조나로 왔는지는 알 수 없어. 아무튼, 그렇게 베티와 남편, 남편의 두 아들이 마지가 일하는 아파트에 도착해."
"잠깐만, 남편의 아들이라고?"
"응. 베티는 아들이 두 명 있는,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이혼남과 결혼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식당에서 일했는데, 거기에서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진 거야. 베티는 남편의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 온 가족이 이삿짐을 푼 후 베티는 아파트 근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남편도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는 것을 보면 일을 하는 것 같아. 마지가 이런 베티의 사연을 알게 된 건, 평소 말수가 적었던 베티가 마지에게 머리 손질을 부탁하면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야.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연을 줄줄 읊게 된다는 마지의 말처럼, 베티가 마지 앞에서 잠시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거야."
"잠깐만, 오늘은 어느 길로 갈래? 직전? 아니면 오른쪽?"
"직진"
동네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에 반짝였다.
"이야기 계속해 봐."
남편이 재촉했다.
"베티 가족도 새로운 환경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여. 주말이면 아파트의 다른 입주자들과 수영장에서 술을 마시면서 어울려. 다른 입주자들의 사연도 소개되어 있지만, 이건 생략할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수영장에서는 밤 10까지만 놀 수 있는데, 어느 날 밤, 10시가 지나도 밖이 소란스러워 마지가 창밖을 내다봐. 베티의 남편이 수영장 가까이에 있는 탈의실 건물 지붕에 올라가 있고, 밑에서 사람들이 소리쳐. 베티의 남편이 지붕에서 수영장 쪽으로 뛰어내리도록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어. 결국 남편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는데, 수영장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탈의실과 수영장 사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남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어처구니없는 잔인한 장면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와우, 너무 충격적이야."
남편도 무척 놀랐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가량 지났나, 베티 가족이 차에 짐을 싣는 게 보여. 베티가 마지에게 와서 부탁해. 월세에서 아흐레가 남았으니, 아흐레분의 돈을 베티의 언니에게로 붙여줄 수 있는지 물어봐. 남편은 뇌를 다쳤나 봐. 히죽히죽 웃기만 하고,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해. 바보가 된 거지. 베티 가족이 떠난 후 마지가 청소하러 그들이 머물렀던 아파트에 들어가. 아파트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 그런데 안방 서랍장의 서랍 하나가 열려 있어. 가서 보니 서랍장 안에 굴레가 들어있어. 그들이 처음 이사 올 때, 이삿짐에서 굴레를 보고 의아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는 궁금해해. 베티가 굴레를 깜빡하고 챙기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놔두고 간 것인지 고민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글쎄. 이제 굴레가 필요 없으니 놔두고 간 게 아닐까? 남편이 바보가 됐잖아."
"꼼꼼한 베티가 깜빡한 건 아닌 것 같고, 놔두고 간 게 분명한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굴레를 벗어버리고 새출발하겠다는 의미일까? 애리조나로 온 것 자체가 새출발이었는데, 상황이 더 나빠졌어. 베티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굴레가 여러 가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생각이 많아져. 그래서 글을 쓰기가 힘든 것 같아. 그리고 그 굴레를 나의 굴레와 연결해야 하는데, 사실 이것 때문에 글쓰기를 계속 미룬 것 같아. 나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나 봐."
남편과 말하다 보니 복잡했던 머리가 좀 정리되는 듯했다.
"두 여자가 쓴 굴레에 대해 일단 먼저 써 보지 그래?"
남편이 제안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시작했지. 두 여자가 처음 굴레를 쓰기로 했을 때는 분명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라고. 마지와 남편의 사연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마지는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 하는 여자야. 오십 달러짜리 지폐에 자신의 이름을 작게 적어 놓고 상상해. 이 지폐는 하와이, 뉴욕 혹은 세상 더 멀리 여행할 것이고, 지폐에 적힌 자신의 이름 '마지'를 발견한 사람들이 마지가 누구일지 궁금해 할 것이라고. 마지의 현실은 상상과 정반대야. 한 장소에 붙박이장처럼 매여 있어. 마음은 두근두근하는데 벗어날 수 없어. 베티도 마찬가지야. 자신의 선택이 굴레가 되어버렸어. 그런데 사람은 말과 달리 굴레를 스스로 벗어버릴 수 있잖아. 마지와 베티는 남편을 떠남으로써 굴레를 벗어버릴 수 있어.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 이 이야기의 배경이 1970년대라고 짐작해 본다면, 그 당시 가난한 여성이 이혼해서 자립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아.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한 달 월세 모으기도 힘든 상황에서, 빈털터리인 상태로 도시로 떠나 거처를 마련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 당신은 굴레가 어떤 의미로 와닿아?"
머릿속 생각들을 두서없이 쏟아낸 후 남편의 의견을 물었다.
"당신 말처럼 여러 가지로 해석되겠지. 삶에서 해온 결정, 어쩔 수 없는 환경, 벗어나기 힘든 습관.... 내가 당신에게 굴레를 씌워 미국에 끌고 온 것? 하하하. 그래서, 당신은 무슨 굴레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진 후 남편이 내 정곡을 기습했다.
"음... 미루기 굴레? 생각만 하고, 열심히 하지 않잖아. 글쓰기도 미루고, 운전 연습도 미루고, 일자리 구하기도 미루고. 게으름의 굴레, 자신감 없음의 굴레, 용기 없음의 굴레...."
내가 쓴 굴레가 눈에 보이면서 어깨가 무거워졌다.
30분가량 산책하는 동안, 공상이 남편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굴레' 독후감을 미룬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일단 한 이야기가 여러 생각거리를 던지면 글 쓸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마구 뒤섞여서 길을 잃고 만다. 어려운 일은 하기 싫어진다. 그러면 이때다 싶어 미루기 대장이 변명거리를 마구 던지며 돌진한다. 글쓰기를 미룬 또 다른 이유는, 나의 문제점을 직시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눈 딱 감고 외면하면 문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냥 숨어 있고 싶었는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국 내 문제점을 정면으로 보게 됐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은가? 굴레는 꼭 벗어버려야 하는 것인가? 굴레를 쓰고도 편안하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굳이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발버둥 쳐야 할까?
남편의 농담 반 진담 반 말처럼, 나는 미국 땅이라는 낯선 환경에 발이 묶였다. 굴레를 써버렸다. 이 굴레는 나의 선택이었다. 아직 이 굴레를 벗을 생각은 없다. 낯선 땅에서 아주 소극적인 사람으로 탈바꿈한 내가 가끔 불쌍하기는 하다. 이것 때문에 여러 가지 부차적인 굴레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가끔은 그 무게에 휘청한다. 그러나 일상은 잔잔하기만 하다. 마지처럼 별일 없이 한가한 하루를 보내며 가끔 꿈을 꿀 뿐이다. 그러면 굴레의 무게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베티처럼 가족을 우선시하고 사랑한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쓴 굴레를 얼마든지 감당해 낼 수 있다. 굴레는 행복이다.
이상한 독후감 프로젝트 끝! 후련하다. 굴레 하나를 벗어던졌다! 앞으로 어떤 굴레를 더 벗어던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나를 해치웠으니 또 다른 하나에도 도전해 볼 수 있으리라. 내 변덕에 긴장하는 나날을 보냈던 나의 공상, 제발 숨지 말아 줘, 앞으로 잘할게. 또한 대성당 프로젝트 여정 동안 나의 말을 경청하고 호응해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명희'라는 굴레를 기쁘게 쓰고 있는 남편, 나의 굴레까지 토닥거려 주는 남편, 남편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써보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