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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Feb 17. 2023

대성당

일상이 무료하고 소통이 그리운 그대에게

눈으로 보고 있으나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귀로 듣고 있으나 집중하여 듣지 않는다. 대충 보고 건성으로 듣는 와중에 머릿속이 정신없이 굴러간다. 타인에게 도무지 집중할 수 없다. 나누는 대화가 공기 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분명 함께했는데 서로 나눈 게 없다. 그나마 뜨문뜨문 남아있는 기억들마저 왜곡된 채 저장된다. 내가 중심인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 타인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어디에도 없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대성당'에도 이런 사람이 화자로 등장한다. 화자인 남편은 타인에 대해 냉소적이고 고립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일 년에 두어 편의 시를 쓰는 감성적인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아내가 열정을 보이는 시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아내가 십여 년가량 시각장애인인 로버트와 카세트테이프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는 것에 대해 약간의 질투를 느끼지만 그냥 두고 볼 뿐이다. 아내가 유별난 우정을 통해 채우고 있는 공허함을 그저 방치한다. 남편은 아내가 잠자리에 들면 혼자 쓸쓸하게 TV를 켜놓고 술을 마시며 밤을 견딘다. 불면증이 그를 괴롭힌다.

삶의 취약성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화자가 고립을 선택한 것과 반대로 화자의 아내는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 집착한다. 군인이었던 전남편 때문에 발령지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던 아내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수 없었고, 그런 고립된 삶이 힘들어 목숨을 끊는 시도마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자의 아내가 시각장애인인 로버트를 위해 잠시 일하게 되었다. 아내에게 로버트와의 만남은 세상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친밀감이자 경이로움이었다. 로버트를 위한 아내의 단기 부업이 끝나고 둘이 헤어지던 날, 로버트가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다며 얼굴을 만져도 되는지 물었다. 아내는 흔쾌히 허락했다. 로버트가 조심스럽게 아내의 얼굴을 만졌다. 사진을 찍듯 아내의 눈, 코, 입을 자신의 손가락에 담아 저장했다. 아내는 얼굴을 타고 전해지는 촉감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특별한 체험이 아내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내는 그 영감을 시로 표현했다. 고립하는 남편과 나눌 수 있는 친밀감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로버트와 카세트테이프를 주고받으면서 아내는 공허함을 조금씩 채워 나갈 수 있었다.

이렇듯 남편과 아내는 서로 자세히 보지 않고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 남편은 술을 마시며 밤잠을 설치고, 아내는 시를 쓰고 편지를 녹음한다.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친밀감을 채워줄 수 없고, 아내는 남편의 고독감을 채워줄 수 없다. 그 이면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딱히 문제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잔잔한 일상은 미세한 진동 하나에도 깨질 것만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의 방문이 이들의 잔잔한 일상에 변화를 불러온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남편에게 아내는 핀잔을 준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수염마저 멋지게 기른 시각장애인이라니, 거기에다가 로버트의 태도는 자상하면서도 당당하다. 볼 수 없으나 보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배려한다. 저녁을 거하게 먹고 술을 몇 잔 마신 뒤 아내가 먼저 잠든 후에도 로버트는 남편 곁에 남는다. 남편과 로버트가 술을 마시는 동안 TV에서 대성당을 소개한다. 내레이터의 설명을 듣던 로버트가 화면 속 대성당에 대해 묘사해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평소라면 그냥 무심코 지나쳤을 의미 없는 대성당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머리를 굴려보지만, 남편은 그 웅장한 정경을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다. 그 순간 남편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된다. 로버트가 남편에게 대성당을 같이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남편이 종이봉투를 가져 와 테이블 위에 펼친다. 남편이 볼펜을 잡자 로버트가 그 위에 자기 손을 포갠다. 둘이 사각형을 그리고 지붕을 세우고 첨탑을 올린다. 로버트가 이번에는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남편에게 제안한다. 남편은 로버트와 손을 포갠 채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리면서 경이로운 체험을 한다. 눈을 감자 비로소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어디에서 주워들은 정보를 토대로 편견만 가진 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냉소적으로 타인을 대하고 세상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게 비단 '대성당'의 남편뿐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한집에 살면서 서로에게 무덤덤한 게 '대성당'의 남편과 아내 커플뿐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 속 '대성당'이 세상과 타인을 의미한다면, 우리 역시 대성당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에 오자마자 불어닥친 팬데믹 폭풍으로 남편과 나는 고립을 시작했다. 남편은 재택근무를 한다. 나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미칠 것 같이 답답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고립은 편안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아주 가끔 세상과 사람이 그리워서 감정이 요동칠 때,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면 남편은 이 불행을 자초한 게 본인인가 싶어서 자책한다. 남편이 이런 생각을 하면 이번엔 내가 미안해진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살 때 언제 당신에게 집안일로 신경 쓰게 한 적 있어? 세세한 공과금 납부부터 집 사는 큰일까지 내가 다 처리했잖아. 병원도 내가 항상 같이 가 줬어. 그리고 내가 당신 한국어 못한다고 트집 잡은 적 한 번이라도 있었어? 내가 왜 매일 당신에게 이거 하라 저거 하라 사정해야 하는데!" 남편에게 이 말을 하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터졌다. 남편 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남편을 원망했다. 당장 한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사건의 발단은 늘 그렇듯 사소한 일이었다.

내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발급하려고 온라인으로 신청했는데 거절 메시지가 떴다. 남편에게 신용카드 회사에 전화해서 거절 이유를 문의해 보라고 부탁했더니 꼭 지금 전화해야 하냐며 싫다고 했다. 전화 영어가 알아듣기 힘들기 때문에 꺼려졌지만, 오기가 생겨서 직접 신용카드 회사에 전화했다. 상담사와 몇 마디 주고받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결국 남편에게 전화기를 넘겨야 했다. 번거로운 확인 절차를 거쳐 들은 대답은 내 신용카드 역사가 부족해서 카드 발급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미 사용 중인 카드가 한 장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모든 게 남편 명의나 부부 공동명의인 미국에서 내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부 공동명의로 된 재산 명세 증빙서를 지참해 지점에 가서 신청하라고 상담사가 조언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화가 나면서 허탈했다. 남편에게 화낼 일이 아니지만 모든 화가 남편에게 돌아갔다. 평소 가정 경제 운영에 관심이 없고, 그와 관련해서 부탁하면 제때 처리하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쌓인 상태에서 불이 붙은 것이다. 영어를 잘했으면 내가 척척 다 알아서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답답했다. 남편에게 애걸복걸해야 하는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정작 문제는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나 자신이면서 남편을 탓했다. "내가 당신 부탁 거절해서 당신이 신용카드 회사에 직접 전화했잖아. 이렇게 연습하면서 영어가 늘면 좋잖아, 안 그래?" 남편의 이 말에 감정이 폭발했다. 남편 말이 맞다. 그러나 억울했다. '한국에서 십 년 넘게 사는 동안 한국어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당신은 한 번이라도 겪어 봤어? 아니잖아. 내가 다 알아서 해줬잖아!' 이런 이유로 나는 당당했다. 영어 때문에 나를 기죽는 상황에 몰아넣은 남편이 정말 미웠다. 남편 탓하는 내가 무척 싫었다.

하루가 지나고 보니, 어제 남편을 심하게 몰아붙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오늘도 남편을 퉁명스럽게 대했다. 이런 내게 남편이 슬쩍 말을 걸었다. 신용카드 지점에 전화해 상담 예약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집 명의에 내 이름을 추가하기 위해 공증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집을 구매할 당시 내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공동명의로 진행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 명의를 차후에 추가하기로 계획했지만 남편이 계속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명의 변경 절차를 알아보는 게 번거롭다는 게 이유였다. 남편과 함께 우체국에서 공증 서류에 서명한 후, 카운티 사무소에 가서 명의 변경 절차를 끝냈다. 몇 년이나 미루던 일을 하루 만에 쏜살같이 해치운 남편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우체국과 카운티 사무소를 오가는 차 안에서 그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볼일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일하러 가야했다. 도서관까지 태워준 남편에게 들릴락 말락 하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런데 이십 분 후 남편이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도서관에 나타났다. 카운티 사무소에서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사 온 것이다. 남편은 이렇게나 나를 챙기는데 그걸 잘 알면서 남편에게 못되게 구는 내가 정말 한심했다. 남편에게 고마우면서 무척 미안했다. 가끔 미친 여자가 되는 내가 정상인가 의심스러웠다.

남편과 나는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지낸다. 낮에는 각자 제 할 일을 하느라 다른 방에 분리되어 있지만 분명 우리는 우리의 대성당 안에 함께 존재한다. 평온한 일상이 대부분 이어진다.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과연 서로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서로에게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고립 속에서 우리의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럴까?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을, 이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마음 깊숙이 숨겨 놓은 채 다정하게 웃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남편과 나에게도 로버트의 방문이 필요하다. 경이로움에 마음이 요동치고 눈이 떠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눈이 떠지는 순간, 서로에 대한 연민이 뒤로 물러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남편의 얼굴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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