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은별 Toni Feb 08. 2023

기차

감정이 메마른 그대에게

미셸 자우너의 책 'H마트에서 울다'에 등장하는 H마트 엘킨스 파크 점은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깝다. 미국에 살면서 한인 마트가 15분 거리에 있다면 로또 당첨만큼 부러움을 살 일이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북서쪽,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동네에 살고 있다. 멋도 모르고 미국으로 이주한 첫날밤, 다 쓰러져가는 집, 가구도 없는 텅 빈 방, 에어 매트리스 위에 누워 가슴 먹먹해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 줄줄이 일어났다. 밥심으로 산다고 했나, H마트에서 한국 음식을 사 먹으며 버텼다. 힘들 때마다 '그래도 한인 마트가 가까이 있는 게 어디야'라고 되뇌며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가한 일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H마트 2층 푸드 코트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30여 개가량의 테이블 중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카운터에서 음식을 주문한 후,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가는 중년 부부에게 양해를 구해 합석했다. 한국인일 거라는 직감에 다짜고짜 한국어로 말을 걸었더니 중년 부부가 상냥하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부부는 똑 닮아 보였고, 남편이 분주하게 아내를 챙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내에게 정수기 물을 가져다주고, 식사가 끝난 후 다 먹은 식판을 치워 주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아내의 외투를 챙기는 모습이 정말 다정다감해 보였다. 잠깐 스치는 사이이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되는 듯, 남편과 내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 떠나는 중년 부부를 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저 아저씨, 당신 같아. 어쩜 저렇게 아내를 알뜰하게 챙기시는지."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저씨를 보면서 남편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 두 분이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께서 가만히 앉아 계시는 동안, 체구가 작은 할머니께서 식판을 세 개나 나르시고 정수기에서 물을 떠 오셨다. 할머니께서는 식사를 드시는 와중에도 연신 할아버지를 챙기는데 온 마음을 쏟으셨다. 중절모와 긴 겨울 외투를 차려입은 멋쟁이 할아버지와 내조에 최선을 다하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잠시 한국의 근대 시절에 가 있는 듯했다. 현대에 살고 있는 내게는 이 그림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고 계시는 할머니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남편과 밥을 먹는 동안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둘러봤다.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각양각색이었다. 미셸 자우너가 책에서 묘사했던 H마트 포드 코트 장면이 떠오르면서 살짝 뭉클해졌다. 귀여운 인도 꼬맹이들이 옆 테이블에서 중국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호기심 가득한 까만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옆 테이블에는 흑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그들의 청소년 아들이 앉아 있었다. 아빠와 엄마를 반반씩 닮은 아들이 듬직하고 예의 바르게 보였다. 또 한 테이블에는 한국인 엄마와 그녀의 두 성인 딸, 어린 손녀가 앉아 있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긴 생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엄마는 사연이 많아 보였다. 아빠가 백인일 두 딸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엄마는 묵묵히 식사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한 끼 식사가 주는 만족감 때문인지 사람들의 얼굴이 그저 평온해 보였다. 사연 하나 없는 가족이 있을까만, 미국 땅의 조그마한 푸드 코트에 옹기종기 모여 한 끼 식사를 나누고 있는 이 가족들에게는 왠지 더 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지금 각자 무심하게 밥을 먹고 있지만, 어쩌면 마음속으로 이방인으로서 겪는 서러움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중 누구라도 붙잡고 귀를 기울이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감상에 빠져 밥을 먹고 있는 동안 문득 레이먼드 카버의 '기차'가 떠올랐다. '기차'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해 다룬 짤막한 이야기다. 늦은 밤, 적막한 기차역 대합실에 세 사람의 타인이 앉아 있다. 젊은 여성인 미스 덴트의 가방 속에는 권총이 숨겨져 있다. 초조하게 가방을 꼭 쥐고 앉아 있는 미스 덴트는 낯선 이를 보며 불안해한다. 두꺼운 화장에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중년 여자는 말이 거칠고 무례하다. 여자와 일행인 백발의 노인은 잘 차려입은 것 같으나 맨발이다. 미스 덴트는 불안감에 떨면서도 중년 여자가 노인을 향해 떠들어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중년 여자의 토막 난 말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러나 도대체 이들이 무슨 관계이며 어떤 까닭으로 이 늦은 밤 기차역에 오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있는 미스 덴트에게 중년 여자가 핀잔을 주자, 미스 덴트는 이 시간에 권총을 숨기고 대합실에 앉아 있게 된 자신의 사연을 쏟아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기차가 역에 도착하고 세 사람은 얼른 기차에 오른다. 기차에 일찌감치 타고 있던 승객들의 눈에 세 사람의 행색과 조합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겠거늘,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슬쩍 쳐다보지만, 기차가 출발하자 승객들은 다시 자신의 고뇌 속으로 빠져든다. 사연을 실은 기차는 어둠을 뚫고 앞으로 나간다.

낯선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 눈앞에 비치는 타인의 외양은 가끔 호기심을 자아낸다. 타인에 대한 무지를 특권인 양 내세우며 내 앞에 우연히 마주 서게 된 낯선 이들에게서 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감정을 충족한다. 공감이 주는 위로, 묘한 우월감에서 느껴지는 안도, 인생의 쓸쓸함, 꿋꿋하게 살아낸 삶에 대한 존경, 왁자지껄함 속에 깃든 생명력, 이기심에 대한 경멸, 비극에 대한 연민, 앞으로 나아갈 희망....

H마트 푸드 코트에서 보았던 중년 부부, 어르신 부부, 국제 가족들, 그 외에 내 눈에 잠시 들어왔다가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 총을 가방에 숨긴 미스 덴트, 행색이 유별난 중년 여자와 노인, 나는 이들에게서 내가 원하는 감정을 마음껏 뽑아냈다. 그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뻔뻔하게 마음대로 추측했다. 사연으로 가득 찬 푸드 코트를 떠나자마자 낯선 타인을 향해 반짝이던 나의 호기심은 사라졌다. 다시 나의 고뇌 속으로 빠져들었다.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