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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노동자 회고록 4

개천절=하늘이 열린 날

by 해일 Mar 21. 2025

러시아 체류는 아에로플로트 항공기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많은 러시아인은 처음 봤다*.

*대부분 러시아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당시에는 러시아인을 다른 외국인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승무원들은 필요 없는 미소를 굳이 지어 보이지 않았고,

사무장처럼 보이는 우락부락한 아저씨는 지나다닐 때마다 기내 조명을 가리며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행 내내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차를 달라고 하면 레몬을 같이 줄 지 물어보는군.’

‘보통 주스는 사과나 오렌지일 텐데 토마토도 있다.’

‘옆 자리 부부는 무려 위스키를 요청했나 보네.’

‘가서 반년 정도 있다 보면 다음에 갈 길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도착 후 생활이 어떨지는 아예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걱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앞으로 반년 정도 수없이 마주칠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도 그저 앞으로 알아갈 생각이었다.




격투기 깨나할 것 같은 인상을 한 승무원 아저씨가 맞은편에서 그림자를 끌며 걸어와서 무심한 표정으로 왼쪽 앞앞줄의 커플에게 다가갔다.

그는 커플에게 뭐라 뭐라 하더니 무릎을 굽혀 쪼그린 자세로 무언가를 들여다봤다.

보안상 혹은 안전상의 문제로 기내수하물 검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당 물체는 간헐적으로 삑삑 소리가 나는 작은 컨테이너 상자였다.


상자에서 나던 소리가 '삑삑'이 아니라 '야옹'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핑크빛으로 상기된 아저씨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것을 본다는 얼굴로 야옹이에게 말을 걸고 계셨다.

커다란 몸을 하고 이동장의 조그만 틈으로 야옹이를 보려 무진 애쓰며.

방금 그 고양이를 동반한 커플에게 가까이서 봐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던 것 같다.


러시아인들은 생각보다 귀여운 사람들일수도 있겠다.


간식으로 나온 오예스도 먹고 자다 깨다 어느덧 입국신고서 한 장을 배부받았다.

더듬더듬 빈칸을 채워나가고 있는데 도통 감이 오지 않는 항목이 있었다.

‘Отчество/Patronymic’

러시아 이름에서 쓰는 ‘부칭’인데 한국인인 나도 아빠 성함을 써야 하는 것인지, 서류 어디에도 우리 아부지 성함은 없는데 굳이 써야 하는지, 쓴다면 이 분이 나의 파파라는 것을 입국심사에서 증명을 하라는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마주하는 서류였다.

역사적인 첫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굉장한 내향형 인간이었고, 살갑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여는 방법을 몰랐다.

‘이리로 가면 정류장이 나오나요?’ 같은 한국어 문장도 어려워서 쓸데없이 탐험을 하고 다녔었는데,

하물며 익숙하지도 않은 외국어로 부탁이라니.


안팎으로 뚝딱대며 입 밖으로 가장 꺼내기 편한 형태로 문장을 조립한 후, 옆에서 위스키를 홀짝대던 부부를 보았다.

감사하게도 중간에 앉아있던 신사분께서 먼저 시선을 주셨다.

‘모른다, 나는, 이것, 쓴다, 어떻게’로 들렸을 게 뻔한 질문이었지만 부부는 자못 심각하게 종이조각을 분석했다.

이윽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또박또박, 눈을 맞추며 외국인이니 쓸 필요가 없을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착륙은 흡사 무형예술이었다.

이 나라는 비행기도 발레를 한다.

기체는 지상에 퉁- 부딪히지 않고 부드럽게 닿은 후 미끄러져 주차하기 시작했다.

기내에서 박수갈채*와 찬사가 터져 나왔다.

*정말로 박수를 친다. 이쪽 문화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믿지 못한다.


이제 정말로 러시아 땅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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