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북경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열하일기 북경 답사기 2 - 공묘, 국자감

by 뮤즈

연암이 북경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조선시대 사행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온 이들이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어딜까? 천하의 서적이 모인다는 유리창琉璃广일까? 아니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다는 천주당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화원의 3배에 달했던 황실 정원 원명원일까? 우리처럼 자금성 또는 만리장성일까?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공묘孔庙가 아닐까 싶다.

공묘는 공자의 무덤이 아니라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취푸)의 공묘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크지만 북경 공묘 또한 그 중요성이 적지 않다. 4월의 주말 연암을 따라 청소년들과 공묘 국자감 박물관에 가보았다.

공묘와 국자감이 위치한 골목은 연암 연행 당시 성현가聖賢街라 불렸지만 현재는 국자감国子监街로 바뀌었다. 이 골목에는 4개의 패루가 서 있는데, 바깥쪽에는 '성현가聖賢街' 안쪽에는 '국자감国子监'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패루에 과거와 현재의 지명이 모두 남아있는 셈이다.

연암은 오랑캐가 세운 원나라 때 처음 만들어진 북경 공묘가 한족의 명나라 때에야 비로소 그 면모를 새로이 했고 명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때까지 이곳을 손질하고 고쳤다며 꼼꼼히 기록했다. 그리고 연암은 고려와 조선의 신하들이 이곳 북경 공묘에서 공부도 하고 중국 문신들과 마찬가지로 예를 다했다고 설명한다.

대성문 앞으로 공자상이 보이고 양옆으로는 진사 제명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은 원, 명, 청대 과거의 최종 합격자인 진사의 이름과 출생지 등을 기록한 비석이다. 현재 공묘 내에는 원나라 때의 비석 3개, 명나라 때의 비석 77개, 청나라 때의 비석 118개가 보존되어 있다.

태화전은 황제의 상징적 업무 공간이니만큼 청나라의 중심이고, 공묘는 조선 사대부들이 공경해 마지않던 공자를 배향한 사당이다. 공자 위패 위에 걸린 편액 '도흡대동道洽大通同'의 뜻처럼 성인 공자의 위대한 가르침이 온 천하를 넉넉히 아우르리라는 이상을 연암은 꿈꾸었다.


중국인들이 공묘에서 가장 오래, 가장 진지하게 구경하는 것이 있다. 대성전 왼쪽에 있는 '제간백除奸柏' , '간사함을 구분할 줄 아는 측백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다.

명나라 가정제 당시 유명한 간신이던 '엄숭' 이 황제를 대신해 공묘를 찾았다. 그가 이 나무 밑에 서자 갑자기 광풍이 불어 나뭇가지가 엄숭의 관모를 쳐 떨어뜨렸다 한다. 그래서 이 나무가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다.


청소년들과 같이 방문하려고 주말 이른 시간 나섰다.

공묘 국자감 박물관은 초, 중, 고등학생까지는 입장료가 무료인데 학생증을 안 가져가 반값(성인 30元,대학생 15元)을 냈다.(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학생증이 없다) 학교에서 Qing dynasty 청 왕조를 배울 때 아이들은 벌써 방문했던 공묘 국자감 박물관이지만,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가보았다.

4월 공묘의 가장 큰 단점은 꽃가루와 초파리와 같은 곤충들이 엄청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꽃가루와 초파리를 피해 옆에 있는 국자감으로 가보았다.

공묘의 서쪽 문은 국자감과 연결되어 있다.

중국 전래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国子監은 공묘와 담을 이웃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공자를 배향하는 사당과 교육기관을 같이 두었는데 두 건물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성균관의 경우 공자 사당이 앞에 위치하고 교육기관인 명륜당이 그 뒤로 자리 잡은 전묘 후학의 배치다. 그와 달리 북경 공묘와 국자감은 동서로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다. 두 곳 모두 남쪽을 향하면서 동쪽에 공묘, 서쪽에 국자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국자감의 주요 건물로 들어서는 태학 문은 다른 문들과 모양이 다르다. 문이라면 의례 있기 마련인 문턱이 없다.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물론 이는 상징적 의미일 뿐 우리나라도 그러했듯이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절차를 통과하는 이들만이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고려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었다.

현재 국자감에서 대표적인 볼거리는 북경 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유리 패방과 그 뒤쪽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벽옹辟雍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연암은 이 둘 모두를 보지 못했다. 연암이 이곳을 다녀간 후인 1784년에야 이 둘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볼 수 없었던 벽공 뜰에서 황제의 강의를 직접 듣는 '영광'을 누린 이가 있는데 연암과 함께 북경에 왔던 팔촌 형님 박명원이다. 그는 연암과 동행해 북경에 다녀간 지 4년 후 다시 북경에 갔고 이곳 국자감에서 건륭제의 강론을 듣게 된다. 건륭제는 박명원 일행을 보고 시종들에게 "이 사람들이 조선의 사신인가?" 하고 물으며 관심을 표했다고 한다.

이곳을 다녀간 후 그림으로 남긴 이도 있다. 우리에게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단원 김홍도이다. 그가 1789년에 연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으로 돌아온 후 총 14폭의 연행도를 그렸다. 단원이 국자감을 구경하고 그린 것은 제10폭 <벽옹>이다.

국자감의 유리 패방은 북경에서 유일하게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패방이다. 1783년에 세워진 이 유리 패방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고 황금색과 녹색 유리기 와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패방의 앞뒷면에는 건륭 황제의 친필 돌 편액이 있는데, 앞면에는 '환교교택圜槗教澤', 뒷면에는 '학 해절관學海節觀'이라고 쓰여 있다.

(*패방(牌坊, Paifāng) 또는 패루(牌楼, Páilóu)는 중국의 전통적 건축양식의 하나로, 문의 일종이다. 해외에서는 중국 문화의 상징으로, 차이나타운의 입구에 많이 세워져 있다)


유리 패방의 뒤로는 벽공이 있다. 벽옹辟雍은 유리 패방이 완성된 지 1년 후 준공되었다. 원형의 연못 중앙에 사각형의 단을 쌓고 그 위에 2층 처마의 목조 건축물을 올렸다.

하지만 연암이 이곳 국자감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륜당과 동서 양편으로 늘어선 학사뿐이었다. 이륜당은 벽공이 세워지기 전 황제가 강론하던 장소였다. 벽옹과 최근 복원된 듯한 이륜당 사이에는 공자상이 하나 서 있다. 중국인들 사이에는 국자감에 있는 이 공자상을 만지면 자식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속설이 있다.

간신을 알아본 공묘의 제백석 나무, 황제가 강의했던 장소 벽옹, 후통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현 가패 방을 지나가며 공묘 국자감 거리를 나왔다. 자금성 또는 유리창 거리를 한 번 더 다녀오게 된다면 계속 답사기를 적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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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간 백 나무, 공묘 대성전


국자감 유리패방, 국자감 벽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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