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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호 Feb 11. 2022

육아의 고수를 만나다

  

첫째, 둘째는 같은 어린이 집을 다녔다. 집에서 가까운 시립 어린이 집이었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만 해도 시립 어린이 집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첫째 때에도 그랬고, 둘째 때에도 어린이 집 적응 기간 동안에 아빠인 내가 함께 갔다.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 중에서 오전 시간은 내가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조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는 있었어도, 아빠하고 온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만큼 내가 어린이 집에 친숙했던 이유는 시작부터 함께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등원도 거의 내가 맡았다. 주 4일 근무를 하는 여유로운 직장 덕분에 쉬는 날에 하원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얼굴도 많이 보면 익숙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선생님과도 친하게 지냈다.


  

어린이에서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운영 위원회를 뽑아야 했다. 맞벌이가 많고,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부모님들이 운영 위원회의 위원이 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운영 위원회는 법으로 못 박혀 있는 것이다. 어린이 집의 운영을 원장 선생님 단독으로는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어느 날, 원장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운영 위원회에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의 통화였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나에게까지 그 부탁을 하는 원장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분기마다 1시간 정도 회의에 참석해서 얼굴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이지 않는가. 어차피 거절하지 못할 승낙이었기에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운영 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나 운영 위원들은 모두가 엄마들이었다. 같은 반 아이 엄마도 있었고, 위 아래 반 엄마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에 우리는 회의를 했고, 회의를 하기 전에 엄마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공교롭게도 운영 위원인 엄마들은 한 자녀를 양육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아이 키우는 고민들이 많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 고민들은 엄마들끼리의 수다스러운 이야기가 되었다. 어린이 집을 어떻게 운영할 것보다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곤 했다. 

  

한번은 아이들 공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2살부터 5살까지 보육하는 어린이 집이었는데, 엄마들은 5살에 어린이 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으로 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6살에 유치원에 입소하게 되면 경쟁률이 커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낮잠이 필요한 5살이 굳이 유치원에 일찍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엄마들은 이런 저런 고민을 하게 되어 있고, 고민은 고민으로 끝이 나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어디를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엄마들의 고민은 바뀐다. 처음에는 영유아 검진에 맞춰서 내 아이의 성장이 가장 중요한 화두다. 몸무게, 키, 머리둘레 같은 성장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좋으면 엄마들은 기쁘다. 그러나 신체적인 성장만으로 엄마들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유치원에 갈 때가 되면서부터 지적인 성장에 고민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영어, 한글 같은 언어를 가르치기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 

  

문제는 그 고민이 상대적이라는 것에 있다. 영유아 검진도 결국 1등부터 100등까지의 순위 안에서 내 아이가 어느 정도에 있는지를 구분하게 된다. 그래서 뒤로 밀려날수록 엄마들은 내 아이에 문제가 있는지 걱정하게 되고, 그 걱정은 ‘내가 아이를 키우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하는 고민을 동시에 던져준다는 것이다. 하물며 신체의 성장이 이럴진데, 배움이라는 교육이 어찌 상대적인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아이가 뒤처지지는 않는지 엄마들은 고민하게 된다. 그런 고민을 엄마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내가 봐도 너무 교양있는 분이셨고, 늘 나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좋은 책을 손에 쥐어 주셨다. 외모는 전인화 이영애를 뺨치는 연애인 급이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곱게 나이 드셨을까?’ 나는 늘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궁금했었다. 엄마들의 고민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도록 두어야 하는 시간이에요. 엄마들이 아이들의 놀이에 개입하고, 무언가를 스스로 배우려고 하기 전에 너무 일찍 알려주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아이 이야기를 해주셨다.      

  

“첫째는 지금 대학교 2학년이에요. 공부를 워낙 잘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 대학교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게 아니겠어요. 제가 보기에 경쟁에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 같더라구요. 번 아웃 burn out 이라고 하죠. 애가 다 타버린 거에요. 얼마나 경쟁이 심했으면 지쳐 떨어졌겠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는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엄마인 제가 개입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동기를 찾아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엄마인 저는 옆에서 지켜만 보는 겁니다. 제가 그 문제에 개입하는 순간, 아이는 독립적이지 못해요.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물론 저도 답답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제 방법은 오직 하나에요.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아이를 그렇게 키웠어요. 둘째도 그렇고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들의 눈빛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너무 뻔하다. 자신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아이처럼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해서 뭐든 할 수 있는 그런 아이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해답이 바로 눈 앞에 있었는데,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엄마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하고 걱정하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선생님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육아의 고수 앞에서 우리들은 조용해졌다. 숙연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서로 다른 방법이 있다. 아이 키우는데 정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다. 저마다 생긴 게 다르듯이 아이도 다른데 어떻게 획일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단 하나는 내가 확실하게 배웠다. 육아 고수의 원장 선생님에게서 내가 확실하게 배운 것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방치하는 것도 방관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일상에 아빠인 내가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것. 그리하여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아이를 잘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 속에는 어떤 희망이 생겼다. 선생님 말씀처럼 아이를 내버려두면. 내 아이도 선생님의 자녀처럼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부모 마음은 정말 묘하다. 과정보다 어떤 결과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그 결과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지금은 과정에 집중할 때임을. 그 과정의 핵심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라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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