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많은 시간을 나는 주로 평범하고 익숙한 방법으로 보낸 것 같다. 그 흔한 여행도 아이가 네 살이 되고 나서야 함께 갈 수 있었다. 실은 아이가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육아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연스럽고 평범한 상황과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쩌다 한 번 대단한 무엇인가를 보여주거나 데려간다거나 하는 식으로는 긴 여정의 육아라는 마라톤을 끌고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편안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의 여행은 즐거움보다는 고행에 가까울 것 같았다. 모두가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때 나는 가족 여행을 가고 싶었다. 물론 우리 부부는 여행에 대한 큰 갈망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연애할 때부터 여행에 대한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갈 기회가 생기면 가는 것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대신 평소에 예쁜 카페나 레스토랑은 즐겨 간다. 가는 길에 예쁘거나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면 멈춰서 들어가 본다. 그렇게 순간순간 우연히 발견되는 곳에서 찾은 즐거움이 아주 컸다. 자연스러운 하루의 일정의 흐름에 맡겨보면 여행 못지않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이랑 놀 때도 그런 흐름이 적용된다. 지나가다가 물웅덩이가 있으면 찰박찰박 뛰어보고 모래가 있으면 모래놀이를 해본다. 옷이 젖던 더러워지던 신경 쓰지 않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주 웃기고 즐겁고 행복하다. 그날그날 발견되는 것들에 따라 놀이는 달라진다.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분다면 그날은 더할 나위 없는 놀이의 날이다. 그런 날 밖에 나가 놀다 보면 더 흥이 난다.
굳이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내가 있는 곳에서 매일매일 놀이를 찾아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새로운 것들도 좋지만 익숙함 속에서 느끼는 신선함은 깊이를 만들어낸다. 내가 생각하는 창의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함 가운데서 나타나는 독창적인 무언가다. 그건 오히려 어떤 것을 익숙하다 못해 지겹도록 바라보고 탐구해서 나만이 알게 되는 독특함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성은 절대 새로운 것만을 접한다고 얻어지는 성질이 아니다. 세상에 수많은 창의적인 사람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결코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분야에서 지겹도록 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끈질긴 탐구심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선을 만들어낸다. 그런 자신만의 관점이 생기기까지 수없이 반복해야 했던 일들은 절대 지겨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흔히 경험하듯 같은 영화를 다시 보면 내가 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고 영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그처럼 사실 어떤 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것을 한번 봤다고 해서, 또는 한번 공부해 보았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가진 정확한 의미와 본질적인 성질까지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어떤 것을 한번 경험해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앞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앞으로 같은 경험을 최소한 열 번, 스무 번은 경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아이는 전혀 지루해하거나 지겨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나는 그걸 아이와의 모래놀이에서 배웠다. 아이가 서너 살에 나는 매일 아이와 모래놀이를 했다. 대부분은 놀이터에 있는 모래놀이장에 직접 갔고 한파나 폭염일 때에만 집에서 모래놀이를 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모래놀이를 했으니 최소한 700번은 넘게 노래놀이를 한 셈이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도구로 똑같은 모래를 가지고 놀이를 했는데 아이는 뭐가 재밌다고 매일 그렇게 열심히 모래놀이를 했을까? 그걸 보며 나는 아이가 같은 일을 반복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스스로 놀이를 응용하고 확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익숙한 것이 주는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이와 동네에서의 활동을 선호했다. 굳이 먼 곳까지 힘들게 나갈 필요 없이 동네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몇십 분만 나가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올림픽 공원이 있었으나 거기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집 앞에도 좋은 공원이 있었고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이 끝나는 12시 30분이 되면 아이를 데리고 늘 그 공원으로 갔다. 놀이도구는 없었으나 자연의 모든 것이 놀이 도구가 되어주었다. 흙을 만져보고 낙엽을 날리기도 하고 열매를 주워서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자연은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공원에서 차분히 한두 시간을 놀면 배가 고팠다. 내가 가져온 간식을 나눠먹거나 아니면 근처 빵집이나 카페로 가서 간식을 사 먹곤 했다.
나는 동네 가게에 갈 때에도 늘 가던 곳만을 갔다. 직원분들은 모두 아이가 아주 어려서 내가 업고 다녔을 때부터 만났던 분들이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방문하면 아이를 무척 귀여워해주고 반겨주셨다. 빵집에 가면 그곳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아이에게 사탕이며 간식거리를 챙겨주셨다. 카페에서는 직원들과 함께 수다도 많이 떨었다. 어떤 날에는 시키지도 않은 와플을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잘못 구워져서 팔 수 없다며 가져다주셨지만 사실 그게 잘못 구워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아이가 우유가 먹고 싶다고 하니 카페에서 사용하는 우유 큰 팩을 하나로 통째로 주셨다. 그런 일들은 많았다. 아이는 어딜 가든 환영받는 아이였다. 어떤 가게를 가든 사장님과 직원분들은 친근하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귀여워하셨다. 한 아파트에서 몇 년을 살게 되자 관리해 주시는 분들과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를 만나면 직원분은 아이를 관리소에 데려가서 한참을 놀아주고 데리고 나오셨다. 손에는 먹을거리를 한가득 들고 온 채였다. 언젠가는 아이 먹이라고 백숙을 건네주기도 하셨다. 청소하는 직원을 만나면 아이는 청소를 돕겠다며 그분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은 아이를 만나면 반가워서 작은 간식거리라도 사주고 싶어 하셨다.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사 인사를 하고 아이는 그걸 맛있게 먹었다.
내가 아이와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하며 한 가지 배우게 된 사실은 '받는 기쁨'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받을 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그때 받는 연습을 해둘걸. 하며 아쉬워한다. 칭찬을 받을 때조차 "감사합니다."라는 수용이 아닌 "아니에요."라고 거절을 표현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쑥스럽고 부담스러웠던 걸까. 받는 것도 확실히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요즘엔 누군가의 마음과 선물을 받을 때, 거절보다는 받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온전히 받는 것, 감사하고 기쁘게 받는 것, 그런 걸 떠올린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늘 받을 것이 없고 받을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더 많이 받는다고. 아이가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여러 가지 선물들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절하지 않고 기쁘고 감사히 받는 것. 아이는 확실히 나보다 받을 줄 아는 아이다. 받을 줄 알기에 언제나 더 많이 받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가 어딜 가든 환영받았던 것. 그건 모두 익숙함의 힘이었다. 아기 때부터 아이를 봐온 분들은 아이의 커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익숙한 사람이 편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나는 일부러 내가 좋아하는 가게 몇 곳만을 주야장천 갔다. 동네는 아이가 세상과 처음 맺는 관계의 시작이다. 아이는 세상에 대한 첫 이미지가 다정하고 친절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신뢰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것들로 주로 놀아온 아이가 새로운 곳에 가면 어떨까? 모든 아이들에 대한 대답은 될 수 없겠지만 우리 아이의 경우에는 새로운 곳에서 매우 적응을 잘하는 아이였다. 매일 같은 것을 보다가 새로운 것을 봐서 신이 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아이의 성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는 어딜 가든 새로운 곳에서 적응이 매우 빠른 아이였다. 아기 때부터 엄마와 잘 떨어졌고 많이 울지 않고 씩씩했다. 유치원에 갈 때도 아이가 잘 적응을 할까, 걱정했지만 아이는 첫날부터 신나게 뛰어들어가 재밌게 놀고 왔다. 마치 원래 그 유치원에 다녔던 아이처럼 말이다. 어린이집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매년 반이 바뀔 때마다 가장 신나 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니 새로운 곳에 가보지 않았다고 해서 아이의 적응력을 걱정하는 건 기우임이 분명하다. 오히려 익숙한 것들 속에서 안정감을 얻는 아이는 어딜 가든 자신을 믿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이의 새로움을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거나 공들여 멋지고 예쁜 것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운 것도 한두 번이지, 언제까지나 새로운 것을 찾아줘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건 아이가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든지 평범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게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자주 상기시킨다. 그러나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것도 노력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가장 어려운 건 힘주는 것이 아니라 힘 빼기라는 것. 그런 걸 요즘에 많이 느끼고 있다. 아이에 대한 관심과 욕심과 걱정을 내려놓는 것, 그런 힘 빼기야말로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지 않을까.
다른 가족들이 모두 휴가를 떠날 때에도 우리는 집을 지켰다. 늘 만원인 식당과 카페도 휴가철엔 한산해서 좋았다. 익숙한 곳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이 주는 안도감도 좋았다. 아이도 그걸 아는지 어릴 때 졸리면 꼭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가장 익숙한 곳, 집과 가족에게 소중함을 느낀다면 다른 무엇이든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또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대단하고 거장 한 것으로 나를 꾸미 않아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고 귀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여행 대신 집에 돌아와 가장 익숙한 모습과 차림으로 가장 익숙한 것을 끌어안고 잠에 드는 게 매우 행복했다.
언제 어디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만큼 안정감을 주는 건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집으로 돌아갈 줄 아는 건 중요하다 맨 처음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게 뭐든 다 괜찮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