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는 ADHD 06화

시간이 두 배 느린 행성에서 살고 있어

나는 ADHD EP06.

by 소양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인듀어런스호가 인류의 새 보금자리를 찾아 처음으로 밀러 행성이란 곳에 도착한다.

이곳의 1시간은 지구의 7년과 같다.


주인공 쿠퍼는 여기서 약 3시간을 허비해 버린 탓에 지구와 23년의 시간의 차이가 생겨버리게 된다.

EP06.png 영화 인터스텔라 中

ADHD인으로서 살다 보면 마치 밀러 행성의 쿠퍼처럼 예상치 못하게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항상 예상시간보다 실제가 2배 정도 더 걸린다.

물론 밀러행성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보다 2배 느린 X2 행성에서 살고 있다.


사회초년생 시절 맡은 업무를 하다 보면 언제쯤 끝나는지 말해줘야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예상되는 시간을 말해주면 항상 실제는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마치 내가 거짓말쟁이 피노키오가 된 것 같아 곤란했다.



이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게 된 건 여자친구 덕분이다.


내가 데이트를 하기 전 할 일이 있거나, 같이 무언가를 할 때 내가 예상시간을 말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매번 맞지 않자 여자친구는 내가 시간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기분 나쁘지 않게 얘기해 주었다.


한 번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함께 친구를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다.

데이트가 마무리되고 약속장소에 도착하게 되는 시간을 친구에게 카톡으로 얘기해주려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여자친구는 내가 적으려 한 시간의 두 배를 불려서 보내라고 얘기했다.


"에이 그 정도는 절대 안 걸려!"

"어어? 시간 관련해서는 내 말 듣기로 했지?"


그렇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여자친구의 예측이 항상 맞았었다.

그 때문에 난 여자친구의 시간 예측을 믿기로 했다.

'시간권'을 모두 양도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항상 틀린 것은 아닐 거라는 소심한 반항심이 종종 속에서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그때마다 여자친구의 예측대로 되는 것을 보면 순응하게 된다.


문제를 인식하고 나서는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2배를 말하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와 이거 너무 과장해서 얘기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딱 들어맞거나 가끔은 이 시간조차 넘는 경우가 있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말하는 습관을 가지자, 희한하게 지각을 하는 일도 없어졌다.

아니, 오히려 일찍 일찍 다니게 되었다.




나의 시간 감각을 믿지 않게 되자 오히려 삶이 편해졌다.

그래서 그냥 내가 남들보다 시간이 두 배 느린 행성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본여행을 가면 전기를 쓰기 위해 돼지코를 사용하듯이, 나도 그냥 예상시간을 2배 늘려주는 나만의 돼지코를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ADHD 특성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는, 특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것' 자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하려 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래 어쩌겠어'라는 물 흐르듯이 살자는 마음으로 특성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살면 오히려 해결이 되는 듯했다.


문제는 ADHD가 아니라 ADHD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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