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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린 May 04. 2023

아바타를 위하여 1

1장

K는 정말 성도착자일까?

레벨 5를 가까스로 획득한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K의 가방을 다시 떠올렸다. 레벨업도 어렵고 아직은 서클 1 마법을 배울 수도 없는 지루한 단계라 게임에 깊이 몰두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부터 나의 아바타인 군주가 혈맹을 창설할 수 있다는 거다. 드디어 내 아바타가 카리스마를 발휘할 순간이 왔다. 군주의 카리스마 수치만큼 혈맹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에 카리스마 수치는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난쟁이를 사냥물로 정한 나는 목표를 향해 커서를 움직였다. 

사냥이 한참 무르익는 순간 나는 또다시 서울역에서 상경하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음직한 커다란 여행 가방을 떠올렸다. 이삼일에 한 번 외출할 때마다 K는 무슨 보물 단지나 되는 양 그 가방을 거머쥐고 나갔지만 나는 낡을 대로 낡아버린 가방 따위엔 어떤 호기심도 느끼질 못했었다. 오히려 그런 구질구질한 가방을 메고 다니는 K의 정신구조가 더 궁금했다. 


"마타하리가 뭔지 알아?"


게임 속 캐릭터와 가방 사이를 어정쩡하게 배회하던 내 머리가 뜬금없는 K의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설마 1차 세계대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성 스파이에 대해 묻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인도네시아 말로 '낮의 눈동자'라는 뜻 이래. 의역하면 한낮의 태양쯤 될 거야."


마룻바닥에 무료하게 꽂히는 오후의 햇살을 등진 K는 검은 실루엣으로 흐려졌다. 지금 내 앞에서 검게 흐려지고 있는 저 남자가 정말 대학시절 가뿐하게 덩크슛을 내리꽂던 그 청년이란 말인가?


"그래서, 뭐?"

"그냥, 이름이 폼나다고. 비밀스러운 스파이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잖아."

"어째서 한낮의 태양이 스파이 이름으로 잘 어울린다는 거지?"


힘만 탕진한 채 난쟁이를 놓쳐 버린 나는 신경질적으로 <Ctrl+Q> 키를 눌렀다. 결국 오늘도 별 소득 없이 게임을 끝낸다. 


"생각해 봐. 넌 한낮의 태양을 볼 수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밝은 대낮의 태양을 당연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실제론 강한 빛 때문에 그 형체를 제대로 볼 수 없는데 말이야. 우린 단지 태양의 실루엣만 바라볼 뿐이라고. 스파이도 그렇잖아.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니까. 참, 그건 그렇고 네 형이 사고당한 게 이쯤 아냐? 동생이었던가?"


K의 궤변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한순간 혈관을 가로지르던 피가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강에서 자맥질하던 소년이 발을 헛디뎌 강바닥에 거꾸로 처박혔을 때의 기분이 지금과 같을까.


"동생이야. 모레가 동생 기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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