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과 조정래 그리고 천명관
예술이 진보하는 것만은 아니다. <베테랑 2>(2024)에서 류승완 감독은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사이버렉카의 사적제재도 말하고 싶고, 형사들의 열악한 처우도 말해야 하고, 학교폭력에 마약소굴까지 말하느라 바쁘다. 할 말이 많은 글이 세련되기 힘든 것처럼 류승완의 전작들에 비해 세련되지 못하다. 짠내 나는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2005)만한 영화가 없다. 그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침드라마 같던, 조정래 작가의 최근 소설 『황금종이』(2024)가 떠오른다.
아침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툭하면 혼잣말을 한다. 아침 드라마는 '아니 그렇다면 최 회장님은 예나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비장한 피아노 효과음)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직접 설명한다. 이런 연출 방식은 쉽지만 세련되진 않다. 게으른 감독들이 내레이션으로 서사를 때우는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예술이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저 기준 정점에 시가 있고, 시는 가장 문학성 짙은 장르로 평가된다. 『황금종이』에서 조정래 작가는 등장인물 한지섭 입을 빌려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대놓고 한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이 왜 대통령이 되었어야 하는가에 대해 과하게 분량을 할애한다. 꼰대 강사 같은 대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현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고 싶었으면 산문집을 냈으면 좋았을 텐데. 주제 의식에 비해 표현 방식이 아쉽다. '돈은 인간의 실존이자 동시에 부조리다.'라는 주제 의식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황금종이』에는 표면서사만 가득하고 심층서사가 없다. 『태백산맥』(1986)을 쓴 거장과 동일인이 맞나 라는 생각마저 든다.
『황금종이』 대척점에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2004)가 있다. 천명관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천명관은 『고래』로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했다. 『고래』에 대한 심사평은 소설문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존 소설로는 현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마음으로 『고래』를 썼다고 한 천명관의 인터뷰를 보고 심사평과 주제의식이 이해됐다.
『고래』의 주제의식은 생의 부조리다. 심층서사는 주인공 춘희가 홀로 벽돌을 빚는 이야기다. 춘희는 생모조차 영문도 모르게 태어나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자라며 벽돌을 빚는다. 아무 죄 없는 자신의 아기가 죽는 생의 부조리 앞에서 춘희는 다시 벽돌을 만든다. 『고래』에서 『페스트』를 보았다. 아무 죄 없는 아이가 전염병으로 죽는 것으로 생의 부조리를 표현한 카뮈가 떠오른다. 춘희의 삶에서 돌을 이고 산을 오르며 저항하는 카뮈의 시지포스도 엿보았다. 춘희 역시 끊임없이 벽돌을 만들 뿐이다.
춘희로 대표되는 『고래』의 심층서사에는 실존을 담았고, 표면서사에는 흥미를 담았다. 표면서사 주인공은 춘희 엄마 금복이다. 금복은 춘희와 대비되는 인간으로 속세의 욕망을 상징한다. 금복의 욕망이 뒤엉켜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건넬 때 천명관은 만담꾼이 된다. 금복의 일대기는 한국전쟁을 거쳐 독재 시대까지 이르지만, 『고래』에서 천명관은 독재자 장군에게 소설의 한 귀퉁이도 할애해주지 않는다. 소설 고래에서 제도권의 본질은 미미하다. 삶이 그런 것처럼.
독재 세력들은 남북 정상회담 때 북측 관료들 기를 죽이고 싶었다. 독재 세력들은 북측이 묵을 호텔 앞에 훌륭한 건물을 짓고자 했다. 건물을 짓기 위해 춘희가 빚은 벽돌을 가져다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북측 관료들이 묵은 방에서는 그 건물이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고 씀으로써 천병관은 제도권을 비웃었다. 춘희가 빚은 벽돌은 제도권에 의해 왜곡되지 않았다.
춘희는 무용하게 벽돌을 빚는다. 장인정신도 아니다. 말없이 벽돌을 구우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일 뿐이다. 춘희 앞에서 제도권은 그저 헛짓거리를 할 뿐이다. 『황금종이』의 한지섭은 옛 대통령 후보를 찬양하는 장광설 늘어놓는다. 반면 『고래』의 춘희는 입을 닫아 버린다. 세상 사람들에게 춘희가 말을 못 한다고 여기지만, 어차피 소통은 무의미함을 춘희 역시 알았을 것이다. 골방에서 혼자 소설 쓰는 소설가처럼.
천명관은 『고래』의 말미의 한 페이지에 춘희가 벽돌을 빚었다는 한 문장만 써놓았다. 다음 페이지에는 몇 년 후에도 춘희는 그저 벽돌을 빚었다고만 썼다. 그다음 페이지에도. 얼마나 우아한가.
"다시 말해, 예술은 무용합니다."
...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폴 오스터의 아스투리아스 왕자 문학상 수상 연설(2006)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