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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17. 2023

#1 숫자

소설 연재


하얀 피부, 단정한 눈썹, 화장기 없는 눈매, 그리고 야무지게 다문 입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재인의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정장을 비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한 데로 모아 뒤통수 아래쪽으로 가다듬고, 입에 물고 있던 무색의 고무줄로 묶는다. 머리를 묶는 오른쪽 손목에는 진갈색의 아날로그 손목시계가 보인다. 이내 그녀는 남색 가죽 백팩을 어깨에 멘 채 검은색 단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엄마, 갔다 올게요.”


대문을 열고 도로변으로 나가 걸음을 재촉하며 신호등을 건넌다. 때마침 도착한 초록색 버스 5410번에 올라탄다. 20분쯤 지나자 버스 안에 안내 방송이 울린다.


“이번 정류소는 한울병원 입구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한울사거리입니다.”


재인은 하차벨을 누르고 버스가 정차하자 곧장 카드를 찍고 내린다. 그녀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한울병원 장례식장’ 간판이 붙은 연회색 건물이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건물을 올려다본다.



***



27년 전 첫눈이 내리던 날, 한울병원 산부인과 분만실에서는 산모의 비명소리와 함께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재인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생후 2주 정도 뒤에 완전히 눈을 떴다. 그때 처음으로 흐릿하게나마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마주했다. 부모의 머리 위에는 서로 다른 숫자 조합이 보였다. 엄마 머리 위에는 221210, 아빠의 머리 위에는 430306.


재인이 성장할수록 사람의 눈보다 오히려 머리 위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알게 된 부모는 걱정했다. 혹시 발달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영유아 건강검진을 갈 때마다 긴장하며 의사에게 물어봤다. 결과는 이상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가 5살 때쯤, 엄마에게 외치듯 말했다.


“엄마 머리, 엄마 머리!”


그녀는 그 말을 반복하며 엄마의 머리 위에 보이는 숫자를 만지려고 했다. 엄마 눈에 그런 재인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부모뿐만 아니라 할머니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볼 때마다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했다.


부모는 재인이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고 소아정신과 병원에 내원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받게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또다시 아무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뿐이었다. 그녀의 특이한 행동이 사라지지 않자 부모는 아이의 이상행동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시작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눈앞에 움직이며 초점을 맞추려 했고, 아이가 눈을 오래 마주치고 있을 때마다 맛있는 과자를 건네줬다. 기력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며 비싼 한약도 지어 먹였다. 답답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절이며 교회며 성당이며 마다하지 않고 나가서 기도까지 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마음을 졸이며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재인아... 엄마랑 아빠 머리 위에 아직도 뭐가 보여?”


어렸지만 영특했던 재인은 점차 그 모든 상황들이 귀찮아졌다. 그리고 다짐했다. 사람들 머리 위에 여전히 숫자가 보이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척 연기해야겠다고.


“아니, 엄마 이제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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