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에서 온 배는 수상쩍다
중세를 마감하는 무시무시한 흑사병은 흑해 연안 크리미아 반도의 카파[1]에서 발생하였다. 1330년대부터 몽고 병사들이 서아시아를 정복할 때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1346년 몽고가 카파를 포위 공격할 때 페스트에 감염된 시체를 투석기로 도시 안으로 던져 넣었다고 한다. 1347년 카파에서 출발한 제노바 상선을 통해 페스트는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 범선에는 짐이나 갖가지 상품, 선원이나 승객뿐 아니라 곡식이나 음식을 훔쳐 먹고사는 감염된 검은 쥐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런 배가 닿는 지중해 항구마다 전염병이 생기고 곧바로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다. 페스트는 메시나 항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에 마르세유 항구를 통해 프랑스에 전파되어 엄청난 희생자를 내면서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춥거나 건조한 지방은 전염이 더디고 저지도 되어 희생자가 적었지만, 그럼에도 페스트는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까지 심지어 대상을 따라 북아프리카를 거쳐 사하라 이남 지역까지 침투하였다.
신의 징벌과 공기 오염
페스트는 어떤 다른 전염병보다 더 빨리 더 넓게 그리고 더 무섭게 퍼져나갔다. 증세는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발병 원인을 몰라 여러 가지로 접근하였다. 주로 종교적이거나 미신적인 차원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부패물의 악취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거나 접촉해서 생겨난다고 진단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행성의 특별한 움직임, 일식이나 월식 또는 예기치 않게 혜성이 나타나는 것과 맞물려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마법사한테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도 나왔다. 결국 공식적으로 전염병이라기보다는 '신의 징벌'로 돌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절부터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포를 별자리의 메시지나 신의 노여움으로 해석하였다. 다른 한편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성술적인 해석 말고도 기원전 1770년 무렵 이미 "환자와 직접 접촉하여 병에 걸린다."[2]고 전염병을 나름 과학적으로 접근한 바 있다. 그리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14세기 중반 안달루시아의 이븐 알카팁과 16세기 초반 매독 연구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프라카스토로가 전염론을 내세운다. 프라카스트로가 쓴 우화에서 매독에 걸린 목동 이름이 시필리스이다.
어쨌든 신의 노여움이라고 보는 시각은 당시 지배층을 형성하던 카톨릭 세력의 이데올로기와 맞아떨어졌다. 페스트의 공포 앞에 사람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신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성당은 속죄의 기도 행렬과 성지순례를 조직화하기에 이른다.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어떤 도시는 노름과 음주며 욕설을 금지시키고 다른 도시는 일요일 노동과 과시적인 복장을 금지하였다. 심지어 가슴을 드러내고 십자가 쇠붙이가 끝자락에 달린 긴 가죽끈으로 스스로 채찍질하는 특정 수도회의 자학행위가 전 유럽으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기도 행렬 행사는 감염의 위험 때문에 곧 금지된다. 채찍질 역시 교황 클레멘토 6세가 규탄하고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1350년에 금지시킨다. 공기 오염이나 신의 징벌이라는 생각은 1720-1722년 마르세유를 휩쓴 유럽의 마지막 페스트 때까지 죽 이어졌다. 중세 때 의사들도 사람과 사람을 통해 옮기는 게 아니라 의학적 근거 없이 물과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 믿는다. 필립 6세가 파리 의과대학에 자문을 구했을 때 페스트는 "공기 오염"에서 온다고 답변한다. 이런 상황에서 치료책으로 공기가 오염된 지역을 피하고 목욕을 금기시하게 되었다[3].
쥐가 옮긴다고?
중세부터 의사들은 페스트의 증세는 알고 있었지만 흑사병이 유럽에 퍼진 지 547년이 지난 1894년 파스퇴르 연구소 출신 에르신이 바실루스 세균을 발견하여 페스트의 병인을 의학적으로 밝혀낸다. 설치류 특히 쥐에 많이 서식하는 벼룩의 내장에 바실루스가 번식하는데 벼룩이 쥐를 물때 이 세균을 게워내서 쥐를 감염시켜 죽인다. 쥐가 죽으면 이 세균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낸다. 바로 인간이다. 사람이 쥐벼룩에 물리면서 페스트에 걸린다. 이런 전파 방식은 1898년 프랑스 의사며 생물학자인 시몽이 밝혀낸다. 벼룩은 동물의 종에 따라 각기 특화되어 서식하는 특징이 있다. 쥐벼룩만 예외여서 야생 쥐나 사람과 공생하는 쥐 나아가 인간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는다. 감염된 쥐벼룩은 대략 48시간 생존한다. 일단 사람이 페스트에 감염되면 인간에 특화된 쥐벼룩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염시키면서 병이 더 넓게 더 빨리 퍼져나간다.
장거리 전파는 쥐들의 온상인 천이나 벼룩의 저장고인 헌 옷의 운송과 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또 다른 특징은 검은 쥐에 서식하는 벼룩이 갈색 쥐에 비해 훨씬 독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쥐벼룩은 따뜻하고 습한 곳에 잘 서식한다.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를 보면 건조한 철에 전염이 멈춰지거나 수그러들고 두 달에서 네 달 정도 한 철 동안 기승을 부리다가 기후 조건에 따라 몇 달 동안 강도가 약해지면서 소강상태가 지속된다. 덥고 습한 시기에 페스트가 재발한 것이 확인되었다. 추운 지방이 페스트의 피해가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이 기생충은 흰색 천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경험적으로 흰 천이 병을 옮긴다고 생각하였다.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 때도 감염경로를 두고 일부 의사들은 "입김을 통해서 사람과의 접촉으로 시체와 접촉해서 심지어 성행위를 통해"라는 가정을 하였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페스트는 쥐가 사람한테 전파시키는 병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쥐는 벼룩의 숙주로서 바실루스를 저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도시에 몰려 사는 쥐들은 감염되어 한꺼번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지만 시골의 야생쥐들은 바실루스를 오래 보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곡물이나 음식이 보관된 창고나 방앗간, 부엌 같은 곳으로 쥐들이 몰려드는 까닭에 전파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첫 증세가 나타날 때까지 잠복기간은 길어서 16-23일 걸리지만 일단 발병하면 감염된 환자는 3-5일 안에 사망에 이른다.
페스트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감염된 쥐벼룩에 물린 자리에 고름 물집이 생기고 검은 딱지가 생기면서 갑자기 열이 오른다. 그래서 흑사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2-3일 지나면 샅이나 겨드랑이 부위가 부어올라 멍울(림프샘종)이 진다. 구토와 두통, 급성 복통이 생기면서 전신에 통증을 느끼고 고열로 몸이 벌벌 떨린다. 이 경우 20-40%는 일 주일 만에 죽는다. 그다음 병균이 혈관계를 파고들어 중독시키면서 패혈증이나 출혈, 환각, 혼수상태의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게 바로 림프샘종 패혈성 페스트로 발병하고 4주 안에 세 사람 중 두 사람 꼴로 죽었다. 가장 급작스러운 경우 감염 초기 위험 수위에 급속도로 도달하면서 림프샘종이 나타나기도 전에 죽는다. 즉사하는 경우는 2%가량 되고 이틀이 되기 전에 급사하는 경우도 30-40%에 이른다.
두 번째로 폐가 감염되는 폐렴성 페스트는 기침이나 재채기, 숨 쉴 때 생기는 비말로 전염된다. 림프샘종 페스트에 비해 훨씬 난폭하고 격렬한 폐렴성 페스트에 걸린 환자는 몇 시간 만에 죽기도 했다. 기침을 하고 호흡 장애가 일어나며 신경 장애를 동반하는 질식 증세가 생기면서 혼수상태에 이르면서 죽는다. 대부분 2-3일 안에 사망한다. 폐렴성 페스트는 치사율이 100%였다!
처음 페스트는 쥐벼룩에서 사람으로 전파되었지만, 그다음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기게 되면서 페스트는 기하급수적으로 환자를 만들어내었다. 모든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중세의 흑사병은 대부분 같은 배를 탄 쥐벼룩에 감염된 검은 쥐를 통해 퍼진 림프샘종 패혈성 페스트이다.
페스트는 해상에서 배가 달리는 속도로 하루에 40킬로쯤 육지에서는 하루에 1,5킬로 이상 퍼져나갔다. 특히 육로를 통한 전염은 백년전쟁 때 이동하는 병사들과 성지순례를 가는 순례자들을 통해 페스트가 더욱 빠른 속도로 번지게 되었다.
바이러스는 늘 외부인이고 타자다.
페스트가 번지면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어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음모설을 꾸며내고 애꿎은 속죄양을 만들어낸다. "페스트 사육자"라고 불렀다. 대표적으로 유태인 박해였다. 그뿐 아니었다. 집시, 마법사, 거지, 외지인, 순례자나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이미 나병원에 감금시킨 문둥병 환자들을 페스트를 옮긴다는 혐의로 아무런 경고 없이 죽였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34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어난 유태인 학살사건이다. 이 도시로 페스트가 번지기 전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극물을 탔다고 뒤집어 씌워 2월 14일에 유태인 900-2000명을 화형시켰다. 전염병 전파자는 언제나 타자다.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 때 검역 당국은 직업(고물상), 이동(외지인), 페스트 관리에서 맡은 역할(도형수), 신분(창녀)을 이유로 "위험한 집단"으로 분류하여 특별 관리하였다.
코로나로 하루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2020년 3월 중순 프랑스에서 집주인이 자신과 같은 건물에 세든 간호사를 내쫓는 일이 생겼다. 또 이웃이 동성애자 앞으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원흉이라고 익명의 편지를 보내는 사건도 일어났다. 물론 그전에 아시아인이 바이러스 전파자라고 지목되어 인종차별을 당한 사례는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미국, 호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중세 흑사병 때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전염되었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죽었다. 시체를 운반하고 매장하며 생필품을 운반하는 등 사회가 돌아가게 하는 최일선의 어려운 일은 다 하층민이 담당해서 이들이 전염에 훨씬 많이 노출되었다. 마르세유 페스트 때 소독이나 시체 운반과 매장은 도형수 출신들이 맡았다.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중세 때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새 직업이 생겨났는데 바로 항구에서 짐 부리는 하역 노동자이다. 최하층민이 이 일을 맡으면서 동시에 페스트 전염 여부를 가리는 생체 실험물로도 이용되었다. 현재 전 국민 감금이 시작되고 재택근무가 일반화된 것 같아도 현장에 나가 일하는 사람은 주로 근무조건이 열악한 직종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다.
격리와 정화
1377년 라구자(오늘날 두브로브니크)와 베네치아에서 처음 검역 격리(quarantaine)가 제도화되었다. 주로 동방에서 오는 상선을 통해 페스트가 퍼지자 감염이 의심되는 선박을 해안에서 떨어진 섬에 정박시키고 선박, 선원, 상품이 감염되었는지 알아보려고 40일 동안 격리를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처음 전염을 막기 위한 격리 전문병원도 생겨났다. 도심에서 떨어진 섬에 격리병원을 짓고 검역이 잘 되게 조직하고 통제함은 물론 향료를 주성분으로 만든 약제로 훈증소독도 하였다.
페스트가 몰려왔을 때 병균을 박멸한다고 마을 전체를 불 질러서 지도에서 사라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중세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잉글랜드에서만 마을 천 개 가까이 버려졌다. 프랑스는 1638년 페스트가 노르망디 지방을 덮쳤을 때 캉 근처의 하층민 촌 뷜리 마을은 성당 건물만 빼고 깡그리 불살라졌다. 페스트의 보균 매개체를 몰랐기 때문에 감염된 건물이며 가재도구를 불태우는 걸 최선의 방역이라고 여겼다.
재빨리 멀리 오래 피신하라!
전염병의 정확한 원인을 모를 때는 감염자와 접촉을 피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최선의 방책인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악수나 포옹이 사라지고 팔꿈치로 부딪히는 인사로 바뀌다가 1미터 이상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것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게 얼마나 지혜로운가! 흑사병이 돌았을 때 도시 사람들이 백년전쟁과 전염을 피해 한적한 지방으로 도피하면서 병이 벽촌까지 퍼지게 되었다.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염병이 최고조에 이르는 1720년 7월 말부터 부유층 3-4만 시민이 이 도시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 결과 마르세유 주변으로 페스트가 더 넓게 번져나갔다.
2020년 3월 중순 프랑스에서 전 국민 감금이 시작되었을 전후, 조건이 되는 사람들은 수도권 지역을 피해 백사십만이 빠져나갔다. 고향의 부모 집으로 가는 젊은이, 바캉스지에 세를 얻어 떠나는 사람[4], 별장으로 휴가 떠나듯 가는 사람… 감금 조치로 행동양식이 달라졌다. 부부가 따로 떨어져 생활하기도 하고, 친구들이며 가까운 가족, 더욱이 연인들끼리도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또 좁은 집에 많은 가족이 오밀조밀 갇혀 살면서 가정폭력이 몇 배가 늘었다. 3월 6일부터 양로시설이 격리되고 가족 면회가 금지되면서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자식들이 양로원 바깥 먼발치에서 창문을 향해 고함치면 갇힌 노인네는 창문을 열고 손짓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감금 기간이 길어지자 이동 규칙을 어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 몰래 친구 집을 찾아가 거리두기를 버리고 껴안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마주 보고 수다를 떠는가 하면, 본능에 충실해 떨어진 남녀가 몰래 만나 정을 나누기도 한다.
코로나에 맞서 현재 세계 각국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다 감금 조치를 실시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분야를 뺀 가게들을 폐쇄하고 각급 학교며 공연장, 영화관, 체육시설, 미술관 등을 닫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을 금지시키고 있다. 중세 페스트 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외교관이나 상인한테 위생 증명서를 발급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위생 증명서가 최초의 여권이었다. 코로나가 번지면서 유럽연합은 옛날로 되돌아가 잠시나마 다시 국경이 생겼다. 프랑스의 경우 꼭 필요한 외출은 신분증과 함께 외출 시각을 적은 이동 증명서를 들고나가야 한다. 규칙을 어기면 135유로의 벌금을 문다.
전염병과 사회 변화
1347년에 시작되어 1352년까지 지속된 유럽 최악의 페스트로 5년 만에 유럽 인구의 30-50%가 죽는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2500만에서 4500만의 희생자를 낸다. 유럽에서만 2500만이 페스트로 희생이 된다. 그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십 년에서 이십 년 단위로 페스트가 규칙적으로 재발한다. 대신 국지적으로 발생하고 강도는 약해진다. 중세에만 적어도 네 차례 페스트가 창궐했다. 실제 프랑스에서 1347-1670년 사이 페스트 환자가 없던 해는 한 해도 없었다. 극단적으로 페스트와 백년전쟁이 뒤얽혀 1418년 페스트 때 파리에서 사망자가 10만을 헤아리고, 1420년 노르망디 지방은 페스트로 인구의 70-80%가량 잃게 되었다. 그 결과 1400년대 인구는 1350년대에 훨씬 못 미친다. 결국 16세기 초가 되어서야 인구 증가가 다시 시작된다.
한편 중세 말 페스트는 당시 농업 생산량으로 전체 인구를 부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구 조절 역할도 하지만 줄어든 인력을 대체할 기술 발전을 부추기는 결과도 가져왔다. 인력이 모자라 인건비가 가파르게 치솟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349년과 1351년에 노동자의 지위와 임금의 상한성을 정하는 법률안을 채택하였다. 노동 집약적인 농작물 중심 재배에서 인력이 덜 필요한 목축을 곁들이게 되었다. 책 제작의 경우 수도사들의 필사본에 의존하다가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손발로 베를 짜다가 직조기가 고안되어 적은 인력으로 생산량은 오히려 늘어나게 되었다.
중세 때 흑사병으로 지중해 연안의 항구들이 무역 중심지로서 입지가 줄어들고 대신 플랑드르 지방의 브뤼헤나 앤트베르펜이 교역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른다. 중세 말 흑사병의 여파로 비잔틴 제국이 쇠약해지면서 몰락의 길을 걷다가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의해 함락이 된다. 또 중국에서는 몽고 세력이 쇠락하면서 원나라가 망하고 명이 들어선다.
다른 한편, 서유럽에서는 노동 집약적인 농업 사회에서 인구가 도시로 몰린다. 아울러 카톨릭을 기반으로 한 중앙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페스트라는 엄청난 재앙에도 유럽에서 권력층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역사학자 파트릭 부셔롱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흑사병을 겪고도 "유럽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페스트의 공포에 휩싸였던 이 세계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그전과 다름없는 기틀에서 재출발합니다". 그러면서 이 역사학자는 당시 아비뇽에 터를 잡았던 카톨릭 종교 세력이 더욱 공고해진 사실을 지적한다. 코로나 위기를 겪고 나서는 "현 시스템을 완전히 갈아엎는 역사적인 기회"로 삼아야 할 텐데…
[1] 카파(Caffa)는 제노아의 식민 기지로 오늘날 페오도시아(Feodosiya)이다.
[2] 기원전 1770년 무렵 마리(Mari) 왕국에서 작성된 편지가 전염병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Jean Bottéro, Mésopotamie : l’écriture, la raison et les dieux, Gallimard, 1987, p. 260.
[3]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학적인 방법과 토양, 공기, 개인의 성향 등 환경 요소에서 온다고 보는 견해는 늘 공존해왔다.
[4] 4월 19일 부르타뉴 지방 한적한 마을에 주택을 세 얻어 감금 기간을 보내려고 갔던 파리에 사는 부부가 바닷가에 나가 일광욕을 즐기며 규칙을 어기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벌금 135유로를 물고 파리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