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넷. '우아한 말투'라는 지혜
“엄마, 나 엄마 말대로 할 테니깐, 좀 기분 좋게 말해 주면 안 돼? 너무 무서워.”
“싫어!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서 안 할 거야!”
“제발 좀 기분 나쁘게 말하지 말아요. 나도 견디기 힘들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내 말투 하나로 인해 온 집안 분위기가 위축되는 걸 보면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다. 내 말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우아함의 기술』(사라 카우프만 저)에서는 사회적 우아함은 신체적 우아함과 마찬가지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아해지기를 원하고 우아해지는 연습을 많이 할수록 더 잘, 확실하게 우아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역량이 다르듯 그 세련됨은 천차만별인 게 당연하다. 책에서는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와 미셸 오바마의 화법, 특히, 그들의 유머 감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우아함의 극치는 말투 아닐까. ‘놀라운 침착함’ ‘단련된 열정’ ‘특유의 편안함과 우아함’이라는 어휘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들이 유머를 사용하는 방식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고 하니, 우아함의 힘은 적나라한 욕망보다 훨씬 힘이 세다. 게다가 이런 고품격 감정 관리로 프리미엄 정치의 가능성까지 선보인 셈 아닌가.
“I don’t mind how much my Ministers talk, so long as they do what I say.”
(장관들이 말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아요. 결국 제 말대로만 하면 되니까요. -마거릿 대처)
“Let’s be clear, Barack didn’t just magically show up. I picked him up. I said, ‘That one looks like he could be president.”
(분명히 해두죠. 버락이 갑자기 나타낸 게 아니에요. 내가 그를 고른 거죠.
‘저 사람, 대통령감이네’ 하면서요. -미셸 오바마)
그녀들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아함도 상냥함도 타고난 재능이라기보다는 치열한 훈련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16세기 피렌체 시인 조반니 델라 카사는 우아함을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아함이란, 늘 갈고 닦아야 진가를 발휘하는 세련됨을 익히고 연마하는 과정”이라고. 예술품과 싸구려 물건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싸구려는 기능과 효용성이 최우선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품은 그렇지 않다. 창작자의 인생 전체를 아우른다. 거기에 독창성이 있고, 철학이 있고, 보는 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내면의 깊이 없이는 쉽게 흉내 낼 수도, 향유할 수도 없다. 우아함이 장인에 비유된다면,‘우아한 일상’ 은 인생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아함을 가장한 싸구려 말투가 난무한다. 그래서 덮어놓고 ‘말투만 고치면’ 모든 게 달라진다는 식의 논리에 거부감이 있었다. 쓸데없는 포장지라는 생각, 저렴해도 실용적인 기성품이 낫다는 생각, 우아함은 일상에서 배어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실제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기치로 내거는 항목 아닌가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상에서도 우아함은, 특히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말투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실용 여부를 따지기 이전의 문제였다. 빈부격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지적 수준과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치열하게 노력해 온 자들만이 이해하는 ‘지혜로움’에 가깝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우아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이해 못 했다. 한 마리 늑대처럼 내리 달려드는 감정을 힘겹게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사람 구실 하기 참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이름 붙이기도 어수선한 내 수많은 자아의 모습이 밉살스럽지만, 투정 부릴 시기는 지났다. 이미 우리는 매일, ‘실전 모드’니까.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신랑의 말투가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나도 잘 안되는 바로 그 부분이다. 가장 사소하면서도 놓치면 곤란한 것들. 어쨌거나 잠자코 듣고 있자니,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터뜨릴까 말까. 늑대 한 마리가 내 마음의 냄새를 맡고 킁킁거리며 덤벼든다. 어떻게 할까. 참아야지. 그래야지. 그렇다고 억지로 눌러서도 안 되는 거지. 빈약하기 그지없는 깔때기로 내 탁한 마음을 정화해 본다.
‘…그럴 수도 있지.’
조용히 과일을 깎는 동안 신랑의 말들은 먼 메아리처럼 들렸다. 다시 깎은 과일을 접시에 담는다. 미리 준비해 둔 샐러드와 함께 식탁에 앉은 그에게 내밀었다.
“과일 먹어요. 그 이야기 너무 많이 했어요.”
신랑이 말했다. “아, 고마워요. 알겠어요.”
내 우아함은 딱 여기까지다. 갈고닦는 노력은 할지언정 정확한 산술로 싸움의 횟수를 줄일 수는 없다. 어제라면 화냈을 일을 오늘은 덜 시끄럽게 넘어가는구나, 내가 작지만 큰 일을 해내었구나, 오늘 조금은 우아해진 거네, 장하네. 하는 가능성을 보았으면 됐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엉 키건 저)에서는 식탁에서 오고 가는 중년 부부의 대화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주인공 펄롱의 감정들, 이를테면, 아내가 크리스마스 케이크을 만들고, 다림질하고, 또 그다음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부산떨 때, ‘멈춰서 돌아볼 틈이 생긴다면 인생이 달라질까’ 하는 부분이나, 석탄 배달부 일을 무한 반복하는 일과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이렇게 마흔 가까이 어딘가로 가는 것 같지도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은 날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되뇌던 부분이 가슴을 후벼팠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건 자신이 한때 버섯공장에서 일했던 때를 떠올리며, 무서운 버섯의 성장을 ‘매일 쌓이는 일상의 반복’과 다르지 않겠다 싶어 아내에게 이야기하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광장에서 들었던 소식을 펄롱 앞에서 풀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피식. 이 짧은 소설에서 내 안의 펄롱과 아일린을 다 보는구나.
소설 속 펄롱은 수녀원에서 곤경에 처한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면서 ‘두렵지만 의미 있는 행보’를 내디딘다. 예상외로 묵직한 결말이고, 생각할 거리도 많다. 여기서 문득 펄롱이 데리고 간 소녀를 보고 아일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졌다. 게다가 펄롱은 앞으로의 더 큰 고통에 각오가 확실하다. 당신이나 나나 그 장면에서 아일린을 대신해서 한마디만 한다면?
내 말투가 지독히도 더디게 나아지는 이유와 한계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상대를 향한 ‘마음’을 담아낼 줄 아는 말투. 그 어려운 걸 할 줄 아는 내가 되어 간다는 것은 내가 좀 더 유연하고 깊어진다는 뜻일 테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힘들지?”
며칠 전, 첫째를 혼내고 안아주었을 때였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범벅이 된 아이의 후끈한 기운은 내 가슴까지 와닿아 찌르르 진동을 일으켰고, 5분 전까지만 해도 흥분으로 떨렸던 내 뺨에도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으나, 그 순간 아이가 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터놓지 않았더라면, 내 품에 안기지 않았더라면, 힘겹게 꺼낸 내 한 마디가 아이에게 이해받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은 끝이 있지만, 이후의 장면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아마 펄롱과 아일린은 큰 갈등을 빚을 것이다. 펄롱이 예상하는 ‘큰 고통’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아일린에서부터일지도 모른다. 소설 주제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많은 가정이 비슷한 형태의 말싸움을 하지 않을까. 부디 상대를 향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말은 사실을 전달하고, 말투는 마음을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