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다섯. 카이로스의 순간을 찾아서
“엄마, 이상해. 평일은 하루가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은데, 주말은 진짜 빨리 가.
평일이 5일이니까 주말도 5일이어야 하는 거 아냐? 힝.”
사람마다 아쉬운 시간이 있다. 아이에게는 ‘노는 시간’이, 직장인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외로운 이들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다. 내겐 ‘혼자만의 시간’이 그렇게 아쉬웠더랬다. 내 전작 『잠시만요, 엄마도 공부 좀 하겠습니다』(스쿠피 저)에도 상세히 설명했지만, 그 시간을 찾아 헤맨 과정은 ‘바른 생활맨’이 되고자 하는 경건한 마음보다는 물리적인 시간의 밀물에 익사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고 일축하고 싶다.
물리적인 시간. 새벽 기상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가사 노동 돌보미 로봇과 다를 게 하나 없는 ‘기능적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새벽 시간을 확보한 후부터는 당황하지 않는다.
‘질적으로 몰입한 시간‘이 다가올 분주함의 쿠션 역할을 톡톡히 해 준 셈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차원으로 구분했다. 이는 단순한 시간 개념의 차원을 넘어 인류의 경험과 우주의 본질까지 관통하려는 옛 조상들의 소중한 지혜이기도 하다. 크로노스가 뭔고 하니,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란다. 현대인들에게 시계와 달력 같은 것,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되어 과학기술 발전에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끊임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점에서 잔인성도 내포하고 있다. 계속 일하면 언젠가 퇴직할 날이 오고, 새로운 사람으로 메워진다. 인간적인 배려? 크로노스의 세계에서 그런 건 없다. 그냥 왔다가 가는 거니까. 그나마 조금 감상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매일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십 년 후에는 3,650그루의 나무가 생기며, 이것은 인류학적으로도, 윤리학적으로도, 기후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행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카이로스 개념을 덧붙여 설명해보자면, 매일 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고 마음먹는 ‘결정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즉, 카이로스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 주관적인 시간이다. ‘인생의 결정적 시기’ ‘운명의 타이밍’ ‘깨달음의 찰나’ 등으로 비유되어 수많은 문학과 예술에 영감을 주는 영역이다. 하긴.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우주가 함께 온다는 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꽃이 되었다는 ‘통찰’을 일상에서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니까.
누군들 카이로스의 순간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넘나드는 시간의 이중성 앞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러워서 그러는 거지.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카이로스의 시간도 찾아서 만끽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진정한 삶과 존재의 의미까지 생각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설파한다. 그래서 요즘 핫한 게 ‘느림’ ‘여가’ ‘명상’ 아닌가.
그런데『세이빙 타임』(제니 오델 저)에서는 이런 식으로 현대인들이 시간 개념을 맹목적으로 이해하고 시간을 분업화하여 관리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시간이 공평하다’는 것은 크로노스적으로 따졌을 때 그렇게 보일 뿐, 사실 사회의 권력 구조나 경제구조라는 큰 틀 안에서 보면, 시간의 가치 자체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쓰는 시간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것인지 깊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내 시간 가치는 육아라는 ‘의무의 압박’, 가정에 무슨 일이 생기면 번외로 해결해야 한다는 ‘심리적 가변성’으로 인해 급락한다. 동시에 육아 앞에서 나는 철저한 약자의 위치에 있으며, 이 사회의 정책이나 구조 문제가 크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현대사회에서 이미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 시간과 생체리듬을 경제구조에 맞추어 생활하는 데 길들어졌다. 심지어 여가조차 ‘인스타에 올리면 예쁘게 나올 법한 배경’을 찾아 숙소 예약을 하고, 숙소에서는 틈틈이 사진 촬영이나 짧은 동영상으로 SNS 인증을 하는 형국이다. 전 세계가 플랫폼 중독인 시대에 저 ‘느림의 미학’마저 철저하게 마케팅계의 미끼가 되고 있다고 꼬집는 대목은 자성할 만했다.
오늘 하루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 배분을 얼마나 잘 했느냐 하는 것은 한편으로 현대인의 중요한 진화 척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시간을 ‘경험’하는 중인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 크로노스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시간에 대한 ‘수평적’인 시선이 ‘수직적’으로 급전환하는 순간을, 얼마나 자주 경험하는 편인가. 무엇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서 있는 그 빈틈, 만족스러운가.
결혼한 여성이라면 크로노스의 시간에 진저리를 칠 것이다. 본디 경제학이라는 것도 ‘돈으로 환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노동’ 여부를 따지는 학문 아니었던가. 미친 듯이 해봐도 모성애를 이용한 육아, 돌봄, 가사 노동은 돈으로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오죽하면 북유럽에서는 이 부분을 집요하게 돈으로 환산해 보여, 사회 정책 수립으로까지 정착시키려는 여성 국회의원이 주목을 받고 있겠는가.(마르가레타 윈베리(Margareta Winberg) 스웨덴 전 부총리는 여성의 가사 노동이 GDP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아무리 AI가 내 잡무를 덜어 주어도, 놀라운 성능과 디자인의 가전제품이 쏟아져도, 역사적· 문화적으로 고착한 차별과 인식은 뿌리 깊었다. 내 엄마와 내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모두가 정신적 유산처럼 인고하여 물려준 ‘아낌없는 사랑의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다 날아가 버렸단 말인가. 내 고귀한 카이로스 시간은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의해 수시로 ‘해체’되었고, ‘자유 의지’라는 이름으로 세뇌되어 혹사당하기 일쑤였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공평한 척하며 끊임없이 현대인의 정신을 채찍질하지만, 당근도 못 먹는 채찍질에 당하고만 있지 말자. 예민한 당신이라면 지나치게 시간을 소분화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시간 배분에 갈피를 못 잡겠다면, 가장 ‘시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부터 살펴보자. 사찰 정중앙에 서 있는 600년 넘은 은행나무, 2,000년 전의 씨앗이 최근에 발아했다는 신문 기사, 강변 바위에서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이끼의 천성과 고문헌에서 배어 나오는 오래된 종이 냄새. 진정한 시간의 의미는 철학에서가 아니라 우리와 가장 닮은 ‘자연’에서가 아닐까.
의도치 않게 생긴 거실의 식물들이 내 무관심에 반응하듯 차곡차곡 쓰러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침저녁으로 무심한 듯 챙겨 보게 된 식물이 하나 생겼는데, 내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뿌리를 하나씩 내리고 줄기를 가르며 잎까지 삐쭉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가 드디어 이 무딘 주인을 정신 들게 하는구나. 이런 거였단 말이지. 정말 대단한데.’
나의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 배분은 이런 식으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친다. 갑자기 곤히 잠든 아이들 얼굴이 다시 보인다. 새벽에 밥 안치려고 쌀을 씻다 ‘원산지가 어디였더라’ 싶어 슬쩍 보게 된다. 아침 먹느라 고개 숙인 신랑의 흰 머리카락과 접시를 내어주는 내 손등의 주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루 24시간 중 ‘하루아침에 생길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은 자세히, 오랫동안,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보살핌을 받아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힘겹게 터득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 배분법이다.
“진심 어린 사랑은 시간과 거리를 넘어 결국 꽃을 피운다.”
-레프 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