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가 그 일을 계속 해야 하나요?

2장 둘. 관계 정리를 하면 분산된 에너지가 모인다

by 스쿠피

“왜 제가 그 일을 꼭 해야 하는지요? 이따가 조용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0년 전, 20년 전에는 내뱉을 생각조차 못 한 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내뱉는다. 왜냐하면, 해도 해도 끝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십에 읽는 주역』(강기진 저)에 보면, 세상에는 ‘비(匪)의 공동체’와 ‘태(泰)의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 군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가 어느 쪽인지 파악하여 태의 공동체에 서야만 적게 주고도 크게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저자 말대로라면, 배를 잘 골라 타야 보람과 가치도 있다는 말이다.


한 직장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레 그 조직의 장단점이 보이는 법이다. 스스로 돌이켜보건대, 일을 적게 해온 편도 아니요, 일 처리에 무딘 편도 아니었는데, 묘하게 귀찮고 난감한 일들만 내게 몰려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나는 승진에 뜻이 없었고, 발언권이 막강한 ‘키 맨’들을 경계했으며, 기를 쓰고 자신의 욕망과 결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관심했다.

나는 왜 스스로 직장에서 내 역량의 한계를 그어 버렸던 걸까. 그것은 오랜 기간 나를 우울하게 만든 원인이자 내 패를 그들에게 너무 쉽게 보여준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군자는 태의 공동체에 있을 때, 에너지가 상승하여 시너지가 일어나기 때문에 자꾸 무언가를 내주게 된다고 한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적게 주어도 크게 돌아온다는 뜻이리라. 나는 군자가 아니다. 그러나 군자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았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방황하진 않았을 거라는, 때늦은 아쉬움이 크다.


언젠가부터 말을 섞고 싶은 사람보다 섞기 싫은 사람들이 늘어난 탓은 아닐까 한다. 점점 내 에너지가 고갈되는 걸 느끼며, 계속 내주어도 눈곱만큼 돌아오기도 힘든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일들은 미세한 틈을 비집고 특정 인물에게 집중적으로 향한다는 걸 인지했을 때, 나는 어쩌면 주역에서 말하는 ‘비의 공동체’에서 잘못된 배를 타고 과한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 직장에서나 가족들에게서나 그런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이렇게 멋진 햇살을 마주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물 한 잔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 참으로 감사한 일이야. 그런데, 아무래도 이 순간에 가족들이 나타나고, 직장이 들어서면 ‘관계’라는 예측 불가의 영역이 생기면서 내 안에서의 평온함은 사회적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억지스러운 연기를 시작하며 애써 착하고 예민한 나는 깔끔하게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 자잘구레한 일들은 마음 놓고 나를 향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 나이 먹도록 또 때와 상황에 맞추어 객체 놀이를 하라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할 만큼 했으니, 관계 정리도 과감해지자. 쓸데없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친목 모임, 안 나가도 괜찮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지능적으로 이용하거나 꺼림칙한 느낌을 남기는 이가 있다면, 잠시 만남을 보류해도 된다. 변하지 않는 우정이라 여기고 싶겠지만, 진짜 내가 힘든 순간에는 달려올 친구, 몇 없다. 꼭 계 모임을 해야만 좋은 걸 먹고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 맞는 사람에게 번개로 데이트 제안해서 지내도 충분하다. 나이 들어 ‘모임이 많아 사는 게 즐겁다’는 건 거짓말이다. 착각(錯覺)이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가면 배우자와 자식들이 얼마나 ‘나와 다른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나의 경우, 그 다름을 뼈저리게 이해했을 때 내 안에 진정한 변화가 가능했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과하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요구할 건 요구해야 했다. 고맙지만 사양해야 할 것들, 서로 누누이 말했지만 변하지 않는 행동들, 각자가 자주 쓰는 어용 해석 정리부터 취향에 맞는 여가를 합리적으로 조율하는 방법까지도. 다만, 무엇이 다른지 관찰하고 파악하는 시간은 각자에게 속도가 있음을 염두에 두자. 내겐 10년간 묵혔다가 조금씩 요구사항을 끄집어내는 것도 용기였다. 아이들은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신랑도 노후 걱정할 나이다. 모든 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나도 함께 변해야 한다. 내 에너지를 무모하게 쏟아부어야 하는 ‘비의 공동체’가 아닌 ‘태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내 안에서부터의 변화가, 내 최측근인 가족으로, 직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순환구조다.


모든 관계는 형성하는 것보다 의미를 부여해 가며 유지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관계의 힘은 파장처럼 움직인다. 그럼에도 문제가 생긴다면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사실 대부분 관계의 원인을 짚어 내기에는 ‘격리’만 한 게 없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격리가 쉽지 않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왜 그런 적 없는가. (가족이든 친구든) 매우 절친한 줄 알았는데, 문제가 생긴 후 지나서 생각해 보면 철저하게 이용당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말이다.


관계 정리를 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에너지 절약이다. 내 쓸데없는 에너지를 절약해서 올된 곳에 쓰기 위함이다. 쓸데없는 곁가지 모임을 줄이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활동으로 채울 수 있다. 내가 쓰고 싶은 마음을 잘 뭉쳐서 쏟아부을 수 있다. 내 에너지의 주파수가 강렬해지고 뾰족해지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 그럴 때, 무엇이든 창조할 힘이 생긴다.

신혼 초와 비교했을 때, 나는 청소와 요리와 빨래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배고픈 순간에 가장 빠르고 무난한 맛과 비주얼로 한 끼를 만족할 수 있으면 된다. 정성스러운 식재료 구입과 레시피 검색, 테이블 세팅에 적화된 주파수는 과감히 낮추었다. 대신, 굶주린 독서에 주파수를 맞추고 에너지를 높였다. 깊은 독서 시간을 확보하고 관련 파장 독서를 꾸준히 하며 외국어 공부와 원서 읽기까지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읽은 책을 요약하고, 그 감상을 토대로 글을 쓰기 시작하니 드디어 ‘나다운 주파수’를 찾았다는 희열을 느낀다. 말하자면, 『몰입의 즐거움』(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저)에서 말하는 ‘자기 목적성을 지닌 사람’에 근접한 것이다!

자기 목적성을 지닌 사람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호기심을 키우는 연습을 해온 사람이라는 특징은 주목해야 한다. 그 무언가에 진정한 흥미를 싹틔워야 ‘눈에 뵈는 것 없이’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잠시나마 내가 나임을 잊을 수 있게 하는 양질의 경험이라면, 검증 끝이다. 집에서 살림에 신경 쓰고, 아이들 가정교육에 신경 쓰고, 생활비 굴리느라 신경 쓴 모든 시간은 나를 잊게 하는 몰입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의 똘똘 뭉친 책임감과 집요함을 새기는 시간이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내 업무의 일을 하는 것 외의 모든 잡무는 ‘(다른 일도 가능한) 에너지를 지닌 교사’임을 자처하는 시간이었다. 그것도 교육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어폐에 속지 말아야 했다. 내 얄팍한 양심을 마음껏 활용한 그들에게는 문제가 없다. 내 에너지를 헤프게 내주고 어설픈 인정을 받으려 했던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학교의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제 저만의 노하우를 차기 담당자에게 인수인계하고 갈 시기이지, 이 일을 끝까지 고수하고 나갈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이 일은 제 업무 영역 밖의 일이었던 것을, 여태껏 협조해 왔던 거고요. 필요한 모든 도움은 드리되, 일을 다시 맡지는 않겠습니다.”

이런저런 관계 정리를 실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람마다 역량이 다르니, 그 임계점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당신이 힘들게 내준 에너지 주파수가 전혀 다른 구도를 만든다면 멈출 줄 알았으면 좋겠다. 만약 묵인한다면 그건 현명한 처세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에 해로운 처세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분위기, 점잖은 말투에 현혹되지 마라. 당신 역시 자유 의지를 지녔으니, 직장에서 최대한 당신의 주파수에 맞는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지내길 빈다.


“있다고 다 보여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말고,

가졌다고 다 빌려주지 말고,

들었다고 다 믿지 마라.”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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