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하나. 중년을 현명하게 보내는 법
나는 어릴 적부터 용돈을 받아 써 본 적이 없다. 그런 시절이었고, 그저 언니들 옷 물려 입으며, 남동생과 로봇 만들고 레슬링 하면서 초등시절을 다 보냈다. 여중 ‧ 여고 시절에 가서야 돈 안 드는 책 빌려 읽고, 심야 라디오에 심취하여 밤을 새워 공부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직장 생활 이후 월급을 받고서도 ‘내 용돈’이라는 소비항목은 없었던 거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당시 십만 원이 조금 넘었던 손목시계를 샀던 일이다. 이 시계 너무 예쁘지 않냐며 엄마에게 자랑했을 때, 엄마는 그랬다.
“월급 받은 지 얼마 됐다고, 그런 고가품을 사니…벌써.”
벌써가 아니라 처음 사 본 좋은 시계였다. 당시 엄마의 반응에 나는 매우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두고 보란 듯이 그 시계는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내 화장대에 얌전하게 잘 있다. 알뜰살뜰 고쳐가며 일할 때나 공부할 때나 여행 갈 때도 그 시계만 보면 ‘첫 월급으로 잘 사서 참 잘 썼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아이 넷을 혼자 감당하면서 용돈 관리까지 해 줄 여유까지는 없었을 거다. 그런데 셋째 딸인 내가 중년이 다 되고 보니, 우리나라의 경제 교육은 어디서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하고 맞벌이로 살아오면서 참으로 바쁘게 일했지만, 내 경제 개념도 함께 성장한 건 아니었다. 비정규직이 많아지면서 정규직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히려 쥐꼬리만 한 월급 받는 최고 학력자 공무원으로 사느니 파이어족이 되겠다며 뛰쳐나가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느 공무원 친구가 말하길, ‘새로 온 신입사원이 명문대 출신에다가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데 편하게 말 붙이고 허드렛일시키자니 참 마음이 불편하다’라고도 했고, 어느 기간제 교사는 ‘학교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일 다 해 보고 나니, 더 이상 직업적 메리트는 없어 보여요.’라며 유유히 나가더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바라봐야 하는 걸까.
한편으로는 누군가 돈의 속성이나 실체에 도가 트여서 내 인생의 주요 길목마다 조언을 해주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봤다. 그러나 누구의 삶이든 자세히 관찰해보면 답은 나오는 법. 찢어지게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살 궁리를 치열하게 해야 했던 사람은 의식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법’에 쏠리게 마련이고, 그에 대한 결핍에서 일말의 자기 철학이 선 후에야 돈의 흐름을 터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적당한 성장 환경을 생각해 볼 때, 돈에 대한 개념은 그 싹을 분명하게 틔울 만한 계기가 없었을뿐더러 그저 돈이란, 조심스럽게 아껴 써야 하며, 낭비하는 못된 습관에 길들어지지 않게 연습해야만 하는 ‘무언의 두려움’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급변하는 금융 지식에 관한 흘러넘치는 재테크 서적 중에서 내 상황에 가장 밀접한 책은 무엇일까. 역시 금융계에서 일하는 엄마들이 쓴 책이다. 그러나 책을 정독해 보면 그들 역시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와 종목 소개 수준에서 그치는 것들이 많았다. 답답해서 다른 저자들의 책을 더 읽어봤더니, 공통으로 강조하는 최신 동향을 따라 부동산이거나, 주식 ‧ 펀드이거나, 짠테크의 방법으로 투자 감각을 기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재테크 서적의 시작은 짠테크이다. 돈 쓰는 재미에 먼저 맛 들이지 말고, 아끼면서 쓰는 요령을 빨리 터득하라는 골자의 이야기들. 그게 자신 없으면 최소한의 마지 노선을 정하여(통장 2개면 충분하다는 사람부터 통장 10개 넘게 목적비로 만들라는 조언까지 아주 다양하다!)합리적으로 지출하라고 한다. 복리 이자니 비과세니 보험사업비를 운운하며 각종 금융상품 가입 시, 꼼꼼하게 살피라는 깨알 같은 팁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어찌 된 게 이런 유의 책을 읽고 있으면 가뜩이나 터질 것 같은 머리가 더 어지럽기만 했다. 너무 기초가 없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으로 부에 대한 개념부터 설명해 주는 소설책도 있으니 읽어 보기로 했다. 알 듯 말 듯했으나, 돈에 대한 테크닉보다는 마인드를 장착시키는 가벼운 철학서 같았다. 뭔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이때부터였다. 다 유용한 책이었지만 거북했던 이유. 나는 돈 굴리는 방법이나 부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돈이 어떻게 사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는지 그 지난하고도 촘촘한 역사적 경위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그 지적 호기심을 해결해야만 나머지 것들이 내 일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그게 내 스타일이었다. 주로 돈의 역사에 대해, 부자가 된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돈 때문에 스러져 간 나라와 영웅들에 대해, 필요하다면 관련 문학 작품까지 찾아 읽었다. 똑똑한 경제학자들은 많다. 그러나 닮고 싶은 인생은 의외로 드물었다. 지켜야 할 가치는 빠진 채, 그저 결과론적인 자료만 수도 없이 우려먹으며 ‘넘사벽’의 노하우를 공개한다고 해서 함부로 따라 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재테크 책에서 삶에 대한 통찰을 얻어 내기란 ‘불편한 진실’이 너무 많았다고나 할까. 돈 공부 좀 하겠다고 덤빈 일에서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끝내 역사와 철학, 문학으로 한 번씩 빠지고 마는 것이 내 의식 수준임을.
사설이 너무 길었다. 짠테크의 마지 노선을 스스로 정했다면, 중년의 부모들이여. 부디 ‘자신만의 용돈 계좌’를 통해 노동과 동시에 현명한 자기 계발을 병행하기를 바란다. 이른바 가정 내에서 개도국에 해당하는 수많은 전업맘들에게 주어진 ‘보호 무역 제도’라 여겨도 좋다. 일하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어디 내가 돈을 벌어도 그게 온전한 내 돈이던가.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한 이후로 아이들 사교육비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딸기를 마음껏 못 먹는다는 이야기, 장을 봐도 생활비는 남편한테 용돈 타 쓰듯 하는 거라 간섭받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이야기, 자신이 돈을 벌어도 구두쇠 남편 잔소리에 못이겨 쇼핑할 때마다 눈치 본다는 이야기 등 ‘불편한 소비 욕구’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더라.
우리 모두 돈을 머리 위에 두고서 조달하려고만 애쓰지 말자. 아무리 돈이 없어도 돈의 효용 감각은 유지하고 살자. 텀블러에, 집에 둔 원두커피 내려서 산책하면 커피값을 아낀다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집 밖을 나와 마시는 심야 커피 한 잔 값을 아까워한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용돈 계좌’에서 매일 저축함과 동시에 못 이루었던 자신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배울 인강비라도 마련해 두자. 당연히 첫술에 배부를 리 없다. 처음엔 카페에서 자그마한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만으로도 괜찮겠다. 그 다음엔 조금씩 계획서대로 실천하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시간과 함께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 믿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만의 용돈 계좌’에서 그 꿈을 실현하는 연습(제조업 육성)을 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돈이 궁핍해질 때가 누구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용돈 계좌만큼은 든든하게 지켜주자. 그 안에서 숨 쉴 여유를 두고, 당장 무엇을 할지 모르겠더라도 끈질기게 고민해보자. 고민 끝에 답이 정해지면 이 계좌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도 상기시키며, 똘똘하게 활용하자. 준비된 자는 잘 울지 않는다.
이제야 로버트 기요사키의 허점도 보이고(그는 베스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책을 낸 이후 개인파산 신청을 한 사람이다), 재테크 책 간간이 인용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고방식도 이해가 되었다. (특유의 뻔뻔함과 배짱으로 파산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이다.), 그리고 굳건한 투자 철학을 지닌 워런 버핏이나 보도 셰퍼의 책에서 내 일상에 적용할 만한 금융 습관들을 찾았다.
화폐는 신용에서 출발한다. 그 신용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명분이 전쟁과 혁명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달러가 기축 통화가 된 이후 현대사회는 모든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까지 하나의 복잡한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신용을 지킨다기보다 ‘신용을 어떻게든 속여 이용하는’ 방법이 난무한다. 게다가 금이 없으니 ‘시장 상황 봐서’ 한 나라가 지폐를 발행하고 금리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한 마디로 ‘절대 가치 상실의 시대’인 거다. 그러니 내가 경제 서적을 어렵게 느낄 수밖에. 앞만 보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선풍기도 아니고 180도 회전까지 해야 한다니!
같은 경제 책이라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해설은 내 일상에 도움 될 리 없다. 내 용돈 계좌에서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한 투자라야 후회가 없다. 일단, 내 호주머니에 실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이 절실한 이유다. 신중한 용돈 관리는 내 간절함의 기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용돈 계좌로 ‘무엇’을 꾸준히 하느냐는, 내가 살아 보고 싶은 가까운 미래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끔 아빠 월급만 바라보고 네 남매를 정신없이 돌보던 엄마를 생각하면 왠지 안타깝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불안해하면서 돈의 기쁨을 누릴 기회마저 놓치고 살았기 때문이다. 만약 엄마에게 용돈 계좌가 있었다면 엄마는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으셨을까. 그 시절, 엄마가 내게 용돈 계좌를 만들어 줄 여유도 없었던 사고방식까지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다. 알다시피, 내 머릿속에 나만을 위한 돈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심적 여유로도 연결되고, 내 자존감과도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도, 나도 ‘용돈 계좌 활용법’의 철학과 요령은 스스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나이 들수록 녹아 버리는 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돈은 머리에 넣고 다녀라. 절대로 가슴에 품지 마라” -조나단 스위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