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지만 결이 있는 ‘에세이’를 읽고 쓰고 싶다
‘나와 에세이’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느덧 밤기운이 조금 차지고 어쩌다 들리는 귀뚜라미소리지만 아직은 한낮의 불볕더위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아직은 한낮 열기에 모자 밑 얼굴은 발갛게 익고 머리카락은 익어 불타오르는 듯하다.
한풀 꺾인 여름날에 홀로 늦은 휴가를 갖는다.
가족들도 제 각각의 이유와 사람들과 여행지로 떠났다.
모두가 도심을 떠난 도시에 홀로 남겨진 하루하루는 적막하기도 쓸쓸하기도 하다.
건강유지와 오래만의 들어온 강의준비를 핑계로 집에 남는다.
홀로 된 여유로움이 오랜만에 뒤죽박죽이 된 방과 책장, 여기저기 널려진 옷가지를 정리해 본다.
계절이 바뀌니 이불도 바꾸고, 옷장 속 정리 안된 옷도 버리고 필기구와 노트북도 점검한다.
그리곤 이 책 저책과 교수용 각종 자료들도 정리한다.
책장의 책도 버릴 것도 버리고서야 이제야 가지런히 놓인 책들이 이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여름에는 솔잎향이 나는 짧은 에세이를,
겨울에는 사유가 담긴 긴 소설을 꺼내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둔다.
올여름, ‘홀로 나기’를 하면서 책장 위에 사두었던 가벼운 에세이 두 권을 꺼낸다.
어제 산 새책도 꺼내든다.
한 여름의 피서가 ‘에세이’인 이유는 가볍지만 청량한 결이 있는 문장 때문이다.
우리는 왜 글인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는가?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거나 사랑이거나 배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은 모두의 마음 어딘가에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그것을 이 글에 담긴 정직한 목소리를 통해 삶을 점점 가시화하거나 극대화한다.
그럼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오래된 질문에 정답이 있지 않겠지만 “글을 읽는 것은 누군가가 쓴 글 속 페이지들을 주워 나만의 마음의 글을 만들고 저장하는 것이다”라는 게 맞을 듯싶다.
마음의 관점에서 글에 스쳐가는 영감과 겹치는 생각의 파편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거기엔 어떤 내 마음 조각이 살아 있을지 몰라서 조심조심해서 그것을 찾는 과정이 된다.
그래서 여름과 함께하는 휴가의 시작은 긴 장편 소설이 아닌 가벼운 짧은 에세이를 읽는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야기의 집합체이면서 사유의 집약이고 동시에 언어의 완성이기도 하지만 전체
를 휘잡아 읽어 내려가기엔 너무 길다.
그래서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인 레제 역시도 좋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왜? 하필이면 소설이 아닌 에세이냐?라고.
그렇다! 에세이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핑계다.
좋으니까 이것저것 핑계를 대보는 것이다.
긴 장마와 잠 못 드는 긴 열대야에 불타는 한 여름이니까!
사유의 결이 있는 짧은 에세이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종일 앉을 새도 없고 서서 일하고 잠깐 앉아 쉴 의자를 마련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 여름,
한번 읽고 구석에 쌓인 책 속 페이지에서 주운 글로 유려하고 기품 있는 문장들로 잡다한 장르의 짧고 여운 있는 에세이를 쓰고 책도 한번 만들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