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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처럼 복잡한 여자아이들의 마음

윤정 글 유준재 그림- 우리는 비밀 사이다

by Applepie

80년대생인 나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그 다음 요즘 대중문화를 힙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젠지세대를 지나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알파세대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젠지세대와 알파세대를 쭉 가르쳐 오고 있는 셈이다. 세대 변화가 느껴지냐고? 물론이다. 젠지에서 알파까지 오는 동안 아이들은 꽤 변했다. 이렇게 신인류가 된 아이들과 X세대부터 밀레니얼세대, 젠지 교사들이 각자의 교실에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함께 지내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변하고 아이들의 문화도 꽤 많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해맑고 순수하고 장난을 좋아하고 공부는 싫은데 체육은 좋고 선생님한테 예쁨받고 싶고 숙제를 안하면 혼날까 무섭고... 이런건 어린이의 천성이라고 봐야 할까? 이 많고 많은 어린이의 천성 중,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힘든 것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바로 '여학생들의 교우관계'이다. 밀레니얼시대인 나도 학창시절에 겪었던 것이고, 수십년을 뛰어넘은 지금의 알파세대들도 여전히 힘들어 하는 것이다.


여학생만 콕 찝은 것이 구시대적 마인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지도해 보면 남학생과 여학생의 교우관계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나야말로 성평등 교육을 매년 하는 사람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이 '여학생의 교우관계'라고 명명할 수밖에. 여학생들의 교우관계는 미로처럼 구불구불 복잡하며 드러나지 않아 은밀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모르게 곪아가는게 대부분이나, 어른이 알았다고 해서 상처난 부위를 도려내듯 칼부터 들이밀면 다 망쳐버린다는 특징이 있다. 마치 실밥을 풀듯 핀셋으로 실 끝을 섬세하게 집어 꺼내야 하는, 몹시도 어려운 작업이다. 마침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 여학생들의 복잡미묘한 교우관계를 잘 보여주는 책을 만났다. 바로 윤정 작가의 '우리는 비밀 사이다'이다.

학교에서 나는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아요. 뒤에서 보면 누가 누구랑 친한지 다 보여요. 특히 내 앞에 앉은 이주아랑 강노을은 둘도 없는 단짝이에요. 둘은 딱 붙어 앉아서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화장실도 손잡고 같이 가고, 급식도 늘 같이 먹어요. 신기하게도 둘은 1학년때부터 같은 반이래요. 벌써 삼 년째 말이에요. (중략) 다들 내 덩치만 보고 내가 무서워하는 게 없는 줄 알지만, 나도 화장실 혼자 가기가 무서워요. 누구랑 비밀 이야기도 몰래 나누고 싶고, 급식도 같이 떠들면서 먹고 싶어요. 나도 단짝이 있으면 좋겠어요.

주인공인 금별이와 주아, 노을이는 모두 3학년이다. 경험해 본 바, 여학생들만의 관계 문제는 고학년보다 오히려 1~4학년에서 더 잦은 것 같다. (고학년은 남녀 가리지 않고 사이버 폭력으로 잘 번진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단짝을 갈망하며 단짝이 없으면 금별이처럼 외로움에 빠지기도 한다. 단짝 친구끼리는 항상 함께 다니고 쉬는시간에도 찰떡같이 붙는다. 생리적 현상의 시기가 같지 않을텐데 화장실도 같이 가며 심지어는 같은 칸에 들어간다.


"주아야, 오늘 나랑 운동장에서 놀다 갈래?" 노을이가 사물함에 가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 나는 용기 내어 주아에게 말했어요. (중략) "나 노을이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아..." 그때 노을이가 오더니 나를 힐긋 보고는 주아의 팔짱을 끼고 창가로 갔어요. 창밖을 보며 둘이 깔깔거리고 웃는데 뒷모습도 되게 닮았어요. (중략)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가방을 챙겼어요. 그러고는 얼른 교실을 빠져나왔지요.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노을이가 너무 얄미웠어요. 주아는 내가 말 걸면 반달눈이 되어 웃어 주곤 해요. 그런데 노을이는 안 그래요. 내가 주아 옆에만 가도 눈이 세모꼴이 되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요. 노을이만 없으면 나도 주아랑 조금 친해질 것 같은데 말이에요.

금별이는 주아가 맘에 들고 친해지고 싶지만 주아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주아 옆에 딱 붙어있는 노을이 때문이다. 게다가 노을이는 금별이에게 친절하지도 않다. 어른이 볼 땐 노을이도 금별이도 주아도 셋 다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건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친하지 않은 친구가 궁금한 마음보다 친한 친구를 나 혼자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걸까? 심지어 한명을 배제하면서 자기들끼리는 결속력을 다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니.


'우리는 비밀 사이다'라니! 원래도 사이다를 좋아하는데 이런 이름의 사이다를 처음 먹어 보는 것은 행운이에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돈을 넣었어요. 기계가 윙 움직이더니 사이다 두 개를 아래로 떨어뜨렸어요. 아래쪽 덮개를 열고 꺼내기만 하면 되었지요. 하나 값으로 두 개를 사다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중략) 목이 말라서 캔 뚜껑을 따려고 하는데, 옆면에 적힌 아주 작은 글씨들이 보였어요. '우리는 비밀 사이다! 1+1이벤트
친구 하나, 나 하나 같이 마시면 둘만의 비밀이 생겨요. 비밀이 생기면, 둘도 없는 단짝 사이가 돼요.'

헉! 뭐 이런 사이다가 다 있어요? 저절로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어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어요. 단짝 사이가 된다고? 문득 주아 얼굴이 떠올랐어요. 주아랑 단짝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학교도 같이 가고, 화장실도 같이 가고, 급식도 같이 먹고, 숙제도 같이 하고... 아 참,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은 무엇일지도 무척 궁금했어요. 나는 마시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집에 와서 사이다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어요. 학교에 가져가서 주아랑 같이 마시려고요.

학교에서 주아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실패한 금별이는 터덜터덜 힘없이 집으로 걷는다. 걷다가, 편의점 1+1 이벤트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금별이는 어떤 음료수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우리는 비밀 사이다'라는 특이한 이름의 사이다를 발견한다. 당장 하나를 따서 먹으려던 찰나, 사이다에 쓰여 있는 문구에 이끌려 내일까지 참았다가 주아와 나누어 먹기로 한다.


내 생일 날짜에는 노란색 형광 별 세 개가 그려져 있어요. 작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내 생일'이라고 적혀 있고요. 내 생일이 되면 단짝 친구, 주아를 불러서 생일 파티를 할 거예요. 노을이는 빼고, 둘이서만요!

금별이가 그토록 단짝을 만들고 싶어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일에 주아를 초대해서 파티를 하고 싶었던 금별이는 과연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거기다 '노을이는 빼고'라는 조건마저 붙었기에 쉽진 않을 듯해 보인다.




단짝을 갈망하는 마음, 단짝을 지키고 싶은 마음, 나만 소외될까 조마조마한 마음, 잘 지내왔던 단짝이 괜히 밉게 보이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화해하고 싶은 마음, 친구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 결국 다 함께 친하게 지냈을 때의 행복감 등을 매우 잘 나타낸 동화였다. 여자 아이들의 미묘한 마음과 교실 상황 묘사가 너무 진짜같아서 혹시 작가가 초등학교 선생님인가? 하고 다시 보았을 정도였다. 작가의 설명을 보니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교사인 나의 공감을 얻은 이유는 이 동화에 나오는 마음들은 우리 모두 학창시절에 느껴본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계기로 관계에 금이 가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다 마음이 많이 망가진 여자친구들을 매년 만난다. 세상 둘도 없는 절친이다가 난데없이 냉랭해진 친구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아이, 사소한 서운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쌓아 두다 끝내 마음이 멀어져 버린 아이, 친구가 가진 무언가가 질투가 나는데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친구 물건에 몰래 낙서를 하는 아이, 내게 다가오는 친구를 포용하지 못하고 밀쳐내다가 친구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아이... 이런 아이들을 보았을때 일차적으로 드는 감정은 과거엔 '배신감'이었다. 내 앞에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착한 친구가 뒤에선 다른 얼굴이 된 것에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쌓이며 이런 일을 매년 접해 본 지금은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되었다. 물론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마음이 맑은건 아니다. 가끔 나도 깜짝 놀랄 만큼 탁한 마음으로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 아이에게 피해를 당하는 친구가 있다면 시급히 어른이 끼어들어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여자 초등학생들은 아직 자신의 감정 표현도 어렵고, 부정적 감정을 끌어안고 있기에는 너무 불편한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력도 부족하고, 포용력도 적고, 한마디로 관계에서 서툴고 또 서툴다. 자라야 하는 몸만큼 마음도 더 커져야 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고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여성들도 그런 시기를 거쳤을 테다. 마찬가지로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런 시기를 겪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하는지, 친구와 나의 알맞은 거리는 얼만큼인지를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서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이때 잘 배워야 나중에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른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마음 아프더라도 잘 지켜보고 응원해 주시길. 그럴 필요가 없는데 '가해자, 피해자' 프레임으로 아이들을 바라본 어른이 섣불리 개입할 경우 아이들은 경험으로부터 배울 기회를 뺏길 뿐 아니라 그대로 뒀더라면 회복되었을지 모를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뜨릴 수 있다.


내년 봄에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 학년 아이들을 만나게 될 지 모르겠다. 다만 어느 학년을 만나더라도 3월부터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와 친구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친구를 소외시키는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교실에서는 말하기 조금 애매하지만 만약 내가 딸이 있었다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단짝 말고도 다른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게 안전하고 건강하다'는 것이다. 혹시 단짝과 틀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보험용으로 친구를 만들어 두라는 말이 아니다. 기쁜 일을 함께 나누고 힘들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나를 지지하는 관계들을 여럿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태어나며 자동으로 얻었던 부모님의 사랑과 달리 내가 다가가고 노력해야 친구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의 열살 남짓한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일지도 모른다. 우리 다 그렇지 않은가. 의도치 않게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친구의 말과 행동, 심지어는 메세지 한줄이나 무응답에도 하루 종일 불편하게 전전긍긍하기도 하는. 법적인 성인이 된 지 20년이 다 된 내게도 인간관계는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아이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아이들이 참 기특하고 의젓해 보이기까지 한다.


되게 마음이 넓은 어른처럼 글을 썼지만 사실은 부족하고 또 부족하기에 간절히 바란다. 내가 따뜻한 눈을 가진 교사가 되기를. '나도 그땐 그랬지.' 떠올리며 아이들의 행동에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내년엔 운이 좋기를. 이런 어려운 일이 내 교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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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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