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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혹시 학교폭력 가해자 엄마가 된다면?

대처보다 중요한 건 예방

by Applepie

최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와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엄마, 준이가 지민이 연필 훔쳤어요. 그리고 승철이 키링도 사라졌는데 준이가 승철이 가방을 뒤지는 걸 승철이가 봤대요."

오호, 사건이 발생한 것인가. 자고 있던 나의 교사 DNA가 자극되었다.

"자세히 말해봐. 준이가 지민이 연필 훔치는 걸 봤어?"


몇개의 문답으로 내가 알아낸 것은 이렇다.

1. 지민이가 연필을 잃어버렸는데 똑같은 연필이 준이의 책상에 있는 것을 지민이가 보았다. 그런데 그 연필에 지민이 이름이 써있었거나 자기 것임을 알 수 있는 표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2. 승철이의 키링은 가방에 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 사라졌다. 그런데 준이가 그 키링을 갖고 있는 걸 본 것은 아니다.


3. 지민이가 먼저 준이가 자기 가방을 뒤지는 걸 '보았다'고 했고 승철이도 준이가 자신의 가방 또한 뒤지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가방을 뒤진 게 맞냐고 준이한테 가서 물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증인도 없다.


4. 지민이, 승철이, 나의 아들은 이런 정황 근거만으로 준이가 물건을 가져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5. 심지어 나의 아들은 이 모든 것을 직접 보지도, 자기 물건을 분실하지도 않았다.


6. 그러나 낄낄빠빠가 뭔지 모르는 나의 1학년 어린이는 반 아이들 모두가 있는 곳에서 선생님께 알렸다.

"선생님, 준이가 지민이 물건 가져갔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별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나의 결론: 지민이, 승철이, 내 아이는 지금 탐정 놀이에 심취해 있으며 준이는 다른 아이들의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선생님의 반응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똑같은 연필은 시중에 널려있으며 가방을 뒤지는 걸 '보았다'는 1학년의 말은 다 믿지는 말아야 한다. 이때, 준이와 준이 부모님의 성향 및 상황판단에 따라 문제가 커질 수도 있으므로 친구를 의심하는 것이 친구한테 작지 않은 상처를 주고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단단히 가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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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아, 너 7살에 재윤이한테 포켓몬 연필 선물로 받았지? 그거 재윤이가 몇 명한테 줬지?"

-"음, 저 말고도 같이 생일파티에 온 친구가 2명이니까 3명이요. 거기다가 우진이 동생이랑 예리 동생까지 하면 5명이네요."

"그것 봐. 똑같은 연필을 갖고 있는 친구는 아주 많아. 그리고 너도 유치원 가방에 있던 레고 키링 잃어버린 적 있지?"

-"네. 제가 빼서 갖고 놀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사라졌어요."

"응 그랬지. 금속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단단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키링은 고리에서 잘 떨어지더라. 승철이도 그렇게 잃어버린 게 아닐까?"

-"그래도 준이가 가져간 게 맞아요. 지민이랑 승철이가 준이가 가방 뒤지는 걸 봤다고 했는데요?"

"그 얘기 오늘 지민이가 갑자기 시작한거지? 그랬더니 승철이가 나도 봤다고 한거고."

-"네."

지민이는 아이 반 남학생 중에서 신체적, 인지적 발달이 빠른 편이며 아이들은 지민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아마 아이들은 지민이가 하는 말을 별 의심없이 믿었을 것이고 승철이는 덩달아 거기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것 봐. 준이가 지민이 연필하고 승철이 키링을 가져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똑같은 연필은 세상에 아주 많으니 지민이가 잃어버린 연필과 똑같은 걸 준이가 갖고 있었을 수 있고 승철이 키링은 아마 가방에서 승철이도 모르는 사이 떨어졌을 거야. 지민이 연필은 엄마 생각엔 누가 가져간 게 아니고..."

-"아, 바닥에 흘렸을 것 같아요!"

"맞아. 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경우는 진짜 흔하잖아."

-"아 맞아요."

"그리고 엄마는 궁금하면 너희끼리 속닥거리지 말고 준이한테 물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게 가장 확실한 해결이지. 대신, 따지듯이 물어봐선 안되고."

-"지민이랑 승철이가 안 물어보면요?"

"그럼 준이를 의심하는 걸 그만 둬야지. 서준이 네가 내일 아이들한테 이제 준이를 그만 의심하자고 말해"

-"아 어렵다. 만약 친구들이 하지 말자는 내 말을 안 들으면 저만 그 무리에서 빠져도 돼요?"

"그래. 그래도 괜찮아. 아니면 친구들이 탐정놀이 하고 있을 때에만 빠져 있어도 되고."

-"탐정놀이 아니라고요! 저희 놀이로 준이 의심한 거 아니예요."

아이는 의외로 탐정놀이란 말에 크게 반응했다. 내가 봤을 땐 놀이가 주는 재미가 더 커보였지만 아이는 나름의 정의감에서 가담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정의감이었든 재미였든 이제 준이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할 시간이었다.


"너희가 준이를 의심하고 있는 걸 준이가 알면 어떨까? 만약 준이가 진짜로 가져간 것도 아니라면?"

-"억울하고 엄청 속상할 것 같아요."

"맞아. 준이한테는 이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어."

-"그럼 제가 내일 애들한테 말 할게요. 준이 의심하지 말자고."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거야."

이렇게 탐정놀이 소동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다만, 아이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는데 그건 내 마음의 불안이었다. 나는 사실 두려웠던 것이다. 준이 부모님이 이걸 문제삼으실까봐, 그래서 혹시나 아이가 학폭 가해자가 될까봐. 이것도 학폭이 될 수 있나요? 묻는다면 '얼마든지'라고 답하겠다. 교육청 심의위원회로 넘어가는 여러 요건을 충족하기 못했기에 학교장 자체 선에서 끝나겠지만 어쨌든 여럿이서 한 명의 친구를 의심하는 행동은 학교폭력이 될 수 있다. 만약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근거 없는 소문을 더 널리 퍼뜨렸다면 정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열기 힘든 기억의 상자를 열어본다. 학교폭력 담당 교사를 할 때였다. 학교폭력 접수가 들어오면 나는 관련 학생의 보호자에게 그걸 알려야 한다. 그게 제 1차 매뉴얼이다. 그러나 '어머님(아버님)의 자녀가 학교폭력에 신고되었습니다.'라는 말에 좋게 반응하는 학부모는 적어도 내 경우 한명도 없었다. 그 당혹감과 두려움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감정으로 1차적 공격을 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만만한 나였다.

"선생님도 우리 애가 잘못했다고 단정지으시는 거예요?"

"선생님은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뭐하셨어요? 저희한테 미리 알리셨어야죠!"

이런 반응이 나오면 그냥 얻어맞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일찍 알려도 문제, 기다렸다 알려도 문제, 너는(학교는) 뭐했냐, 왜 말을 딱딱하게 하냐, 왜 그애 편만 드냐 등등 폭포수같은 공격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으므로. 괜히 나를 보호하려고 '어머님,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지금 저희 통화를 녹음하고 있습니다.'는 말을 했다가 더 큰 공격을 받을 수 있기에. 그 무렵 세상을 떠나기를 택하신 많은 선생님들의 마음을 나는 그때도 지금도 충분히 이해한다. 학교도, 교육청도, 교육부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을 때. 출구가 없어 보이는 깜깜한 터널에서 걷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을 때.


힘들게 열었던 기억의 상자를 다시 힘겹게 닫는다. 아무튼 이래서 나는 학폭이 싫다. 싫은 정도가 아니라 트라우마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학부모로서도 학폭에 얽힐 여지가 더 늘어났기에 단단히 예방을 해야 한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물었다.

"애들한테 얘기 했어? 준이 의심하지 말라고?"

-"아, 친구들이 이제 그 얘기 안하더라고요. 관심이 사라졌나봐요."

거봐, 지나가는 탐정놀이 맞다니까. 귀여운 녀석들. 이번 일은 1학년의 미숙함이 만든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난 듯해 참 다행인 한편, 별거 아닌 일에 과하게 불안의 레이더를 가동시킨 셈이 되었으므로 머쓱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내가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개입하고 아이의 말과 행동을 코칭해 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이는 꾸준히 성장을 할 것이고 내가 봐온 수많은 사춘기 소년들처럼 아이의 마음과 행동은 복잡해질 것이며 내게 입을 닫는 순간도 올 것이다. 나는 아이의 속을 지금처럼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없을 것이고 그러다 내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학부모처럼 당혹감을 느낄 날도 올지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아이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쌓는 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예방의 거의 전부이다. 몇년 후의 아이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입을 닫아버리지 않도록.


"엄마, 열시 넘으면 안 재워주죠?"

잘 준비를 후딱 하지 않고 느릿느릿 늑장을 부리는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다. 잘 준비 다 마치고 열시까지 눕지 않으면 아이 혼자 잠들어야 한다는. 다행히 아이는 열시 전에 잘 준비를 마쳤다. 나는 아이와 불 꺼진 방에 나란히 누워 아이의 머리칼을, 그새 땀이 난 이마를, 통통한 팔과 다리를, 더 통통한 배를 만진다.

"엄마가 재워주는 시간이 제일 좋아요." 라는 아직 아가같은 1학년. 지난 7년간 휘청이며 경로를 많이 벗어난 줄 알았으나 그래도 멀리서 보면 대체로 반듯한 길로 향하고 있나 보다. 참 다행이다. 아직 내 품안에 있어서. 내가 너의 성장을 도울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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