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오늘 아이들이 순해진것 같지 않아요?"
2교시가 끝나고 동료샘이 하신 말씀이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항상 아이들 안에 위태롭게 찰랑이던 분노나 억울함 같은 것들이 오늘은 좀 덜 보인다고 느끼던 차였다. 걔네들 다 어디갔나, 참 신통방통했다.
"귀찮더라도 체육시간은 꼭 지켜서 나가야겠더라."
-"맞아요. 꼭 그러려구요."
어제는 3년만에 체육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체육대회라는 말에 아이들은 흥분했지만 사실 나는 좀 귀찮기도 하고 심드렁했다. 예전에 어떻게 했더라, 추리닝 바지 입고 출근할수 있어 편하겠네. 그나저나 오늘 경기가 싸움으로 번지지 않아야 할텐데, 설마 스포츠 경기하다 학폭이 열리진 않겠지?
코로나는 학교의 모습을 꽤 많이 바꿔놓았다. 우왕좌왕 입학식도 개학식도 못했던 2020년이 지나고 1,2학년 전면등교가 시행되었던 2021년도 지나, 전학년 전면등교를 한 올해였지만 그 모습이 전염병 이전과 같을 순 없었다. 손소독, 거리두기같은 용어가 일상이 되었고 짝꿍, 쉬는 시간, 체험학습, 체육대회 같은 것들은 점점 잊혀져 가던 차였다. 개학하자마자 주말사이 한 반에 2~3명씩 확진이 된 대 유행이 지나고 확진자는 급감했다. 5월부터 학교는 조심스럽게 3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첫번째 행사가 바로 체육대회였다. 학년 체육대회를 준비하며 우리학년 다섯명의 교사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렸던 것은 '경쟁활동'이었다. 반 대항 경기를 할 것이냐 말것이냐, 찬성하는 쪽은 체육대회인데 승패가 있는 스포츠의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고 반대하는 쪽은 분명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내비쳤다. 난 물론 이 학교에서 학폭을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반대. 하지만 폭력이 생기지 않도록 교사들이 철저히 감독한다는 전제 하에 반 대항 경기를 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전 같았다면 공 만지기 전에 손소독하고 중간에 또 하고 서로 거리를 두느라 맘껏 즐기지 못했을 경기였다. 모두를 찝찝하게 붙들어 놓았던 그것을 벗어버리자 아이들은 훨훨 날았다. 잠재워 놓았던 승부욕을 맘껏 드러냈다. 교실에서는 그런 공격성이 항상 제지당했지만 상대를 꺾고 싶다는 마음이 스포츠에서는 잘못된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뛰고 싶은 만큼 높이 뛰었고 던지고 싶은 만큼 힘껏 던졌다. 솔직히 심판을 보는 나도 프로야구를 보는 것만큼이나 재밌었다.
그동안 억눌렸던 공격성을 표출할 기회를 주면 큰 폭력으로 번질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아니, 스포츠는 아주 건강한 공격성 표출 방법이라는걸 나는 간과했다. 상대 반에 막강한 선수가 있다면 그 아이를 제거하는 작전을 세우는 것도 스포츠에서는 건전한 전략인 것이다. 우리반은 2승 2패, 딱 중간의 성적이지만 아이들에겐 성적보다 4경기를 뛰었다는 경험이 더 행복하게 남은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위대한 소속감까지. 백날 교실안에서 강조해도 안먹히던 것들을 아이들은 자연스레 흡수했다.
경기가 끝나고 지난 2년간은 상상도 못했을 일을 했다.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이다. 당연히 교실에 나 있는 온갖 문을 활짝 열고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조용히 먹기를 조건으로 세웠지만 아이들은 잘 따라줬다.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순한 강아지 같았다. 3년 전 같았으면 체육대회에서 실컷 땀을 흘리고 교사들이 준비한(주로 학교 예산이지만 때로는 사비이기도 하다.)시원한 간식을 먹는 것이 생경한 일이 아니었을 테지. 아이들 마음속에 있던 여러 모양과 색깔의 앙금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눈 녹듯 사라지고 나는 그런 아이들이 마치 내새끼처럼 이뻐서 오구오구, 체육대회는 이토록 달콤하고 개운하게 마무리 되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신나는 모습으로 하교했고 나는 묵직해진 다리와 함께 교훈을 얻었다. 해소해야 하는 감정들은 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아이들의 성장에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땀을 흘리는 일이, 건강하게 감정을 발산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한풀 꺾인줄 알았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더라도 2학기에는 땀을 흘리는 시간을 꼭 확보하려고 한다. 그것이 피구든, 축구든, 설령 주차장 한쪽 구석에서 하는 긴 줄넘기라도 말이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같이 하는 스포츠라면 더욱 좋겠다. 그리고 킥보드를 타는걸 너무 좋아하는 나의 아들의 시간도 뺏지 말아야지. 유치원 숙제는 충분히 땀을 흘린 다음에 해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