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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성장시키는 일상의 힘

이벤트보다 일상이 훨씬 중요합니다.

by Applepie

언젠가부터 '일상'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노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짧아 일상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온 시점부터인것 같기도 하고 SNS가 중요해지면서 보여주기 위한 삶을 중시하는 세대를 비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일상의 중요성이 강조된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이 '일상'이라는 용어를 좀 빌려서 우리 아이들 얘기를 하고자 한다.


3학년 A군은 특별한 경험을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하는 편이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이면 특급호텔의 빙수를 먹었다는 얘기나 고급 영화관 좌석에서 영화를 봤다는 자랑을 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곤 한다. 게다가 이번 여름방학에는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제주에서 한달살기를 해본 경험이 있는 등 또래에 비해 화려한 이벤트가 참 많은 A군. 하지만 학교에서의 모습은 다른친구들에 비해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수업시간 40분 동안 집중하는 것을 힘들어하여 건강상 다른 문제가 없음에도 꼭 중간에 화장실을 가고 숙제를 해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아이답지 못한 거친 언어를 많이 쓰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친구들과도 쉽게 충돌한다. 낙서가 가득한 교과서나 책상, 난도질 당한 지우개를 보면 치료가 필요한 다른 정서적 문제가 있는지 걱정도 된다.


읽는 분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제주 한달살이나 해외여행, 특급호텔의 빙수, 영화관의 컴포트 좌석같은 것에 대해 전혀 나쁜 감정이 없다. 오히려 시간과 돈만 허락된다면 앞서 열거한 것들을 다 해볼 마음을 언제나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읽는 분들이 괜히 뜨끔한 마음을 가지지 마시길! 요점은 화려한 이벤트로 아이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아이의 일상을 단정하고 내실있게 정돈하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는 얘기니 말이다. 주말이나 여행보다 매일의 하루가 아이의 바른 성장에 더 크게 기여하는 것을 나는 교실에서 수없이 보아 왔다. 아이 본인도 모르게 조금씩 아이를 성장시키는 일상의 힘, 그렇다면 아이의 하루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맞벌이 가정, 외벌이 가정, 하교 후 꼭 들러야 하는 장소 등 아이마다 가족마다 상황과 모습은 아주 다를테다. 어떤 아이는 하교 후 곧장 집으로 가는가하면 돌봄교실이나 학원차를 타는 아이도 있다. 또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친척 어른이 운영하는 가게나 근무하시는 직장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도 있다.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라 아이들의 평일 하루의 모습은 같을 수 없지만 꼭 들어가야 할 것들을 네 가지만 제안해 본다. 그것은 해야할일, 자유시간, 대화시간, 신체활동시간이다.


1. 해야할 일(학습 관련)을 하는 시간

학교나 학원 숙제도 좋고 하루에 문제집 몇장씩 풀기, 독서, 일기 같은 글쓰기도 좋다. 뭐가 됐든 매일 이어갈 수 있게 너무 빨리 끝나지도, 그렇다고 버겁지도 않은 양으로 보호자와 함께 정한다. 이때 시간도 같이 정하면 좋다. 예를 들면 매일 저녁 먹은 후 수학 연산문제집 2페이지, 도형문제집 2페이지 풀기로 엄마와 약속하는 것이다. 엄마가 매일 검사해주는 방식도 좋고 보호자가 퇴근이 늦는 경우 특정 장소를 정해서 거기에 올려놓기로 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다. 주의할 점은 이것이 학원으로 대체되진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원 수업은 자기주도 학습이라곤 볼수 없으니 말이다. 학원엘 다녀온 후 학원숙제를 한다든지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시간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2. 아무 의무가 없는 자유 시간

하루에 해야할 일만 잔뜩이라면 그 아이가 행복할까? 한데 요즘 교실에서 그런 아이들을 자주 본다. 몇년 전 6학년 담임할때 정서행동검사에서 위험군이 떴던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서 상담하는데 의외로 '학원숙제'가 원인인 경우가 많아서 놀랐다. 학원숙제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의 학원숙제가 너무 많아서 자유시간을 확보할 수 없을 정도라면 나라면 학원을 정비하고 단 30분이라도 자유시간을 만들어 줄 것 같다. 자유시간이 있으면 단순히 몸과 마음이 쉴수 있다는 점 말고도 다른 효과가 있는데 그건 아이가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기 시작한다는 거다. 나도 미취학 아들에게 하루에 매일 해야할 일 두 가지(유치원숙제, 수학 문제집)와 자유시간을 주었는데 조그만 머릿속에서 이것을 요리조리 궁리하는 것이 보인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이냐부터 오늘은 저녁에 외식을 할거니까 미리 수학을 해야한다는 말에도 수긍한다. 물론 아이가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가졌던건 아니다. 달콤한 자유시간을 먼저 써버리고 졸린 눈을 비비며 숙제를 했던 경험, 저녁에 일정이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해서 숙제를 못하고 유치원에 갈뻔한 경험들이 쌓여 아이는 조금씩 바뀌었다. 얼마 전엔 '하원 후 놀이터 갔다온 다음 집에 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자유시간 가진 다음에 저녁 먹고나서 바로 수학 문제집을 풀래요. 그 다음 잘때까지는 또 자유시간이에요.'라고 스스로가 하원 후의 시간을 차례를 정하여 분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뿌듯했다. 이때 자유시간을 굳이 자유시간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일부러라도 자유시간이라고 명명하는것이 더 효과적일거라 생각한다. 그냥 자투리 시간인 것보다 자유시간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아이가 더 큰 해방감과 만족감을 느낄 것 같으므로.


3. 어른과의 대화 시간

따로 시간을 마련하지 않고 온 가족이 모이는 저녁밥상이나 다음날 아침밥상도 좋다. 그러나 교대근무나, 늦은 퇴근으로 아이의 얼굴을 보기 힘든 부모님도 많으므로 그런 가정은 꼭 매일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또, 꼭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고 간단한 쪽지나 편지로 따뜻한 말을 전달하는 것도 좋겠다. 물론 꼭 부모님일 필요도 없다. 돌봐주시는 할머니, 시터 등 친밀한 어른 누구와도 좋다. 누구든 좋으니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과 대화하는 시간을 꼭 확보해주시라.


4. 신체활동 시간

신체활동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단순히 신체의 건강을 넘어 부정적 감정 해소, 감정 조절 능력 등 정서에도 큰 도움이 되는 사례를 많이 봐왔다. 아이가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매일 있었으면 좋겠다. 당연히 태권도, 수영 등 운동 관련 학원도 좋다. 그냥 놀이터에서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정글짐에 올라가는 것도 매우 오케이다.


글을 쓰다 보니 아이들에게 또 새로운 의무를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계산해보았다. 하루에 이걸 다 하려면 적어도 몇 시간이 확보되어야 할까? 어른과의 대화는 따로 시간을 뗄 필요가 없으니 그건 제외하고 매일 학습은 초등학생이라면 30분~1시간 정도? 신체활동은 20분 이상은 신나게 논다고 가정하면 저 네가지를 다 하는데 1~2시간정도 들 것 같다. 초등학생이 10시에 잔다고 가정하면 저녁 식사 이후로만 시간이 확보되어도 충분히 가능할것 같은데, 가정마다 생활패턴이 다르니 확신하진 않기로 한다.


앞서 사례를 든 A군의 경우 아이의 하루하루가 바로 세워지지 않았는데 이걸 바로잡기 보다 일상 이외의 것에 더 에너지를 쏟는 부모님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A군의 부모님 역시 나처럼 맞벌이를 하시느라 아이가 원하는 만큼의 관심과 에너지를 충분히 주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쉬우실 테다. 그래서 온전히 아이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 시간이 날 때엔 특별한 일정을 계획하실 마음이 너무도 잘 이해되지만 방향만 조금 바꿔보시는건 어떨까 생각했다. 여행 딱 한 번만 안 가고 그 시간에 그 동안은 자세히 보지 못했을 아이의 일상을 함께 살아보는 거다. A군의 경우 핸드폰 게임 시간이 하루 3시간을 넘긴다고 했다. 너무 많으니 적정한 시간을 아이와 함께 대화하여 정하고, 학원 동선이 너무 길진 않은지, 아이의 하루 중 유혹에 빠지기 쉬운 시간대나 코스가 있는지 살펴보기, 아이가 미디어 의존도가 심하거나 나이가 어려 보호자 없이 일상의 루틴을 소화하기 버겁다면 1~2시간 간단한 학습이나 생활을 살펴주는 시터를 고용하거나 동네 공부방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겠다. 이렇게 A군의 부모님이 일상의 중요성을 아시고 한번만 점검해주신다면 A군은 더 바람직하게 성장할 것 같다. 그냥 간단히 계산해도 35년 정도를 산 나의 하루가 인생에서 갖는 비중과 겨우 10년 남짓을 산 아이의 하루가 갖는 비중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교실에서 24명의 단단하고 알찬 일상을 위해, 그리고 우리집 꼬마의 알록달록하면서도 곧은 일상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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