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와 포기는 한 끗 차이
#응답하라 2017
나 : 나 책 쓸 거야. 작가가 되고 싶어.
남편 : 지금 출판 시장이 얼마나 어려운데...
나 : 나 작가가 되는 게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 지금 하는 사업 앞으로 5년만 지나면 하기 힘들어. 다른 일을 준비해야 해.
남편 : 서울대학교 OOO 교수님은 책 내려고 글 다 썼는데 출판 못하고 결국 블로그에 그냥 다 올렸대. 그리고 OOO은 여행 책을 썼는데 안 팔려서 시아버지가 결혼식 때 하객들한테 답례품으로 나눠 주고 겨우 2쇄 찍었대.
나 : 아, 진짜! 난 할 거야.
그렇게 남편은 내가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태클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오기가 불타올랐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너를 무릎 꿇게 하리라!'
늘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2019년에 첫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책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미러링이나 악수와 같은 스킨십 활용은 매우 유용했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읽으면서 안 될 일도 되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나에게 생겼기에,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야심 차게 글을 썼다.
하. 지. 만.
책이 출간된 후 들이닥친 코로나 녀석은 나의 노고에 농익은 재를 뿌렸다. 모든 만남은 중단되고 대부분 재택근무에 돌입했다. 비대면의 시대에 호감 가는 첫인상 만드는 법, 올바른 악수법, 몸짓으로 상대방의 속마음 읽는 법과 같은 내용은 날짜 지난 신문이 되어 버렸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쓸모 없어진...
책이 출간되자 남편은 꽃다발과 와인을 준비해서 서프라이즈 축하를 해주었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이어진 나의 새로운 도전들은 죽죽... 큰 실패도 큰 성공도 아닌 무맛, 무취 같은 존재였다. 차라리 쓴 맛이었다면 일찌감치 포기라도 했을 텐데. 정말 맛있다는 소수의 손님들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식당을 했었던 부모님도 그랬을까.
유튜브, 두 번째 책, 온라인 강의 등 비스니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콘텐츠로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남편은 뚱한 표정과 안 될 거라는 말로 계속 태클을 걸었고, 결국 하고야 마는 나의 추진력에 두 손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일을 돕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내 일에 기대를 걸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도전의 결과는 언제나 남편의 뚱한 표정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럼. 에. 도. 불. 구. 하. 고.
나의 오기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가끔은 궁금하기도 했다. 나의 강력한 의지가 남편을 향한 오기인지,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한 것인지.
지난 2월, 나는 또 다른 꿍꿍이를 시작했다.
#응답하라 2024
나 : 온라인 콘텐츠로 ~~~ 이런 거 하면 어떨까?
남편 : (뚱x100한 표정) 안 돼. 지금 트렌드랑 안 맞아.
나 : OOO 출신에 OOO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엄청 반응이 좋아.
남편 : 그 사람은 OOO 임원 출신이잖아.
나 :...
남편 승!
그 순간, 꿇은 것은 남편의 무릎이 아닌 내 무릎이었다. 내 스펙이 뭐가 부족하냐며 따져 묻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오래된 오기는 꺾였다. 당분간! 새로운 도전은 하지 않기로 남편과 약속했다.
그동안 애써 지켜온 나의 신념이 무너지는 듯이 슬펐다.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남편의 한 마디에 좌절하고 무너진 것인지, 내 기운이 다해 내려놓고 싶을 때 마침 얼씨꾸나 이때다 하게 된 것인지.
확실한 것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들 중 비중 높은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나의 일상에 큰 변화가 없다.
나는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고, 열변을 토하며 코칭과 강의를 하고 있고, 내 강의로 인해 사람들의 눈빛이 변화될 때 보람과 희열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내 안에 꿈틀거림이 없다. 고요하고 잠잠하다.
오랜 세월 늘 꿈틀거리던 내 안의 에너지가 없으니 내가 아닌 것 같다.
50이라는 나이 때문인지, 남편의 말 한마디에 기가 꺾여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무기력이라는 역병이 돌고 돌아 내 차례가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다음은, 나에게 무기력이라는 역병을 전염시킨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지난 8년의 기록.
[오늘의 필사]
우리의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존재로 느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과 이미지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삶과 사업에 대해, 실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감정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감정이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감정에 이름표가 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당신이 멍하거나, 맥이 빠져 있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단절된 느낌을 갖거나 또는 마음이 텅 비었다고 느끼는 모든 감정은 더 또렷하게 인식되는 다른 감정만큼이나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세요.
- 헤일도스킨의 <세도나 메서드> 중에서
P.S 우리 집은 적지 않은 책장으로도 부족해서 곳곳에 책들이 쌓여 있다. 책장에 꽂힌 책을 더 많이 보거나 더 소중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아껴보는 책인데 쌓인 곳에 있으면 책과 저자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오늘 필사할 책은 그 쌓인 책들 중 맨 아래에 있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꺼내려다 쌓인 책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책들을 바로 세우다 <세도나 메서드>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이 보였고, 그중 한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을 기록했다. 고맙게도, 오늘 나에게 찾아온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