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우울증 N년차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나랑 결혼할거야?
(아니 부부끼리 이런 무한 실례의 질문을 다...)
아니라고, 웃으며 장난하듯이 얼버무렸다. 진심이 들킬까봐 더 활짝 웃었다.
남편의 병명을 정확히 안 것은 결혼하고 5년 쯤 되었을 때였다. 남편은 무기력하고, 숙면을 못하고, 감정 기복이 심했다. 결혼하고 줄곧 그래왔기에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거나 결혼 생활이 힘들어서일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죽.고. 싶.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 말은 칼을 품은 바람이 되어 내 가슴을 관통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포 하나하나가 찢어질듯이 아팠다. 꿈에서 가슴에 칼을 맞고 깨어나도 그 고통이 생생한 느낌이다. 지금도.
그냥 놔두면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가끔은 자다가 남편의 생존을 확인했다. 숨은 잘 쉬는지.
남편에게 병원에 가보도록 권했고, 그 병원에서 정확하게 진단을 해 주었다. 남편이 겪는 많은 증상의 원인이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다. 불면증, 감정기복, 무기력은 물론이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머리 회전이 빨리 되지 않는 것까지도. (남편은 똑똑한 사람인데…)
의사는 치료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거라고 했다.
남편의 무기력을 보아 온 것도 어언 9년이 되었다.
살얼음판이었다. 마음이 아픈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은.
남편도 그랬을 것 같다.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우린 각자의 방식대로 ‘아픈 마음‘과 싸워야 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겨울바다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보면 차갑지만 고요하다. 그 고요함 속에는 거친 파도와 깊은 어둠이 숨어 있다. 그 어둠이 언제 물을 뚫고 올라와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주변을 삼킬지 모른다. 그래서 겨울바다의 차가움은 두려움을 품고 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의 숨겨진 외로움과 깊은 고독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일 수 있지만 속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싸우고 있을테니까.
남편도 겉모습이 잔잔했기에 '죽고 싶다'는 고백이 더 크게 들렸다. 남편은 더이상 죽고 싶은 것 같지는 않다. 무기력과 싸워서 이겨내는 자기만의 방법도 찾은 것 같다. 어쩌면 무기력을 나에게 전염시키고 자신은 해방이 된 것이 아닌지 '상황적 의심'이 되지만, 남편에게 에너지가 느껴져서 다행이다.
필사는 남편이 시작했다.
남편의 필사는 ‘필사적’이었다.
닥치는대로 필사하는 남편에게 왜 그렇게 하냐고, 그렇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내가 그 필사를 하고 있다.
남편처럼 필사적이지는 않지만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다. 필사가 나의 한 부분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필사 중에서]
바보가 아니라면, 나는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환경보다 더 훌륭한 조건이 갖추어져서 인간의 영혼을 즐겁게 해주는 곳은 별로 없다. 아아, 확실히 그렇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이다. 사랑받는 가족이 되어 노인으로부터 아들 같은 사랑을 받고, 아이들로부터는 아버지처럼, 그리고 로테로부터도! 그리고 점잖은 알베르토, 이 사람은 짓궂은 장난으로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일도 없고 진정한 우정으로 나를 감싸며 이 세상에서 로테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해준다. 빌헬름, 산책을 하면서 서로 로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본다면 자네도 틀림없이 즐거워할 거야. 그럴 때 우리의 관계만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런데도 그것을 생각하면 이따금 눈물이 솟는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P.S. 남편! 다음 생에는 아프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