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도 덥다, 사무실에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영 시원찮아서 선풍기를 틀었다. 선풍기 바람에 서류가 날리고 컴퓨터 아래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떨어졌다. 아침에 손질하고 온 머리가 제멋대로 날려서 스타일이 망가졌다. 오후가 되니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다. 딱히 덥다고는 할 수 없으나, 덥지만 않을 뿐이다.
오여사는 몸과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은 위기감에 이러면 안 되지, 이러다 실수라도 하면 안 되는데, 하고 정신을 다 잡았다.
7시 회원인 재희와 재희 아버지가 먼저 나와서 재희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재희가 오여사의 눈치를 살피며 출입문 옆에 있는 장애인 가족화장실에 들어간다. 거긴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니까 1층 화장실을 쓰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는데도 녀석이 함께 있는 아버지를 보며 똥배짱이라도 생겼는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밀고 들어간다.
재희가 나왔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얘, 왜 거기를 들어가니? 1층 화장실을 써야지."라고 하면 재희의 체면이 구겨질 것이다. 오여사는 잔소리 대신에 일상 토크로 방향을 돌렸다. "재희야 내일 뭐 할 거야? 묵묵부답이다. "일단 늦게 일어날 거지?" "네." "유튜브 볼 거야?" "유튜브 안 봐요." "그럼 게임할 거야?" "게임 안 해요" 안 보고 안 한다는 재희의 대답에 오여사도 더 이상 이어갈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토요일이라도 맘대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했다가 재희가 대답하기 귀찮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재희 가족이 나가고 나자 열린 출입문으로 갑자기 커다란 검은색 나방이 날아들었다. 직원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어떡해!"
"제가 퇴치할게요." "주임님, 왜 이렇게 침착하세요?" "저는 나방 따위 전혀 안 무서워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서 퇴근하세요, 주말 잘 보내세요."
나방이 낯선 환경에 놀랬는지 퍼득거리면서 정신없이 탈의실로 날아 들어간다. '나방아, 그쪽 아니야, 너 지금 반대로 가고 있거든, ' 오여사가 손을 쓰기 전에 근처에 있던 미화 여사님이 갖고 있던 걸레로 나방을 쳤다. 나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워서 바깥으로 내보내려는데 수영을 마치고 나오던 회원이 나방을 밟았다. 꿈틀거리던 나방이 그만 죽었다. '아구, 너 오늘 재수 옴 붙었구나.' 길을 잘못 든 대가가 죽음이라니, 나방이 안쓰러웠다.
탈의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회원 두 사람이 나갔다. 늦어도 20분까지는 퇴장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소용이 없다. 시간을 준수해 달라고 한 번 더 말하려는데 그들이 선수를 쳤다. "일찍 나가려는데 드라이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잘 나오지 않아서 늦어졌어요." 했다. 오여사는 그들의 변명에 "네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평소에도 탈의실을 자기 집처럼 사용한다. 아니 자기 집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예사로 드라이기를 30분 이상 붙잡고 있다. 쉼 없이 돌아가는 드라이기 소리가 데스크에서도 잘 들린다. 어떤 회원이 나가면서 고자질을 한 적도 있다. "지금 탈의실에서 드라이하는 사람 내가 봤는데요, 머리카락에 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에서 드라이를 갖다 대더라고요,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최소한 흐르는 물이라도 닦고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오여사는 그 순간 어떤 유명인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그러라 그래'
더위가 가셔지지 않았다. 머리라도 묶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 머리끈을 찾았다. 없다. 문구 통에 노란 밴드가 있는지 보았으나 이마저도 없었다. 뭘로 묶나? 옳지, 일회용 마스크를 꺼냈다. 귀에 거는 줄을 떼서 양쪽을 묶어 동그랗게 만들었더니 부드러운 흰색 머리끈이 되었다.
꽁지머리라도 머리를 묶으니 살 것 같았다. 퇴근하던 강사 선생님이 "머리를 묶으니까 너무 귀여우세요." 했다.
'머리를 자르지 말고 다시 길러서 묶고 다닐까?' 방금 전까지 기장을 더 자르고 싶어 했던 것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뭐야!" 했다.
오여사는 남아 있는 업무를 정리하며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하루를 평온하게 마무리한 것이 문득 새삼스러웠다. 그녀는 퇴근하기 전에 다시 한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키오스크, 공기청정기, 에어컨, 선풍기도 잘 꺼졌다. 금고가 들어 있는 캐비닛이 잠겨 있는지도 다시 확인했다. 퇴근 지문을 찍기까지 몇 분의 시간이 남았다.
오여사는 마지막으로 듀얼 모니터에 깔려 있는 업무 프로그램을 닫고 시스템 종료를 클릭했다. 점들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화면을 바라보며 입사 후 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외쳤던 '존버 이즈 위너(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승자)'라는 말을 되네이며 잘 버텨준 자신에게 엄지 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