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쏜살같이 흘러서 부산에 내려올 때 초등학교 4학년이던 큰 아이가 중 3이 되었고 초등 1학년이던 딸이 초등 6학년이 되었다.
과일 가게를 위한 에너지는 바닥이 났다. 지치고 피곤하고 고달프기만 했다.(만년 일꾼으로 돈 맛을 못 본 탓이 크리라 ) 어머니 처럼 유능한 과일 장사로 거듭 나는 데에도 실패했다. 아는 사람이 오면 퍼주기 바빴고 (어머니 왈, 공과 사를 구별 못하고 그렇게 퍼주면 쪽박 찬다.)손님이 오면 본능적으로 싱싱하고 좋은 과일을 권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 손님의 말에 대해 공감을 넘어 곧잘 손님과 한편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남편에게 쌓인 화풀이도 할 수 없었다. 과일 박스도 지ㄴ보다 더 멀리 집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올라왔고, 더 억센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퍼붓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진로 문제도 코 앞에 닥친 현실이 되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게 해서는 안된다, 그건 안될 말이야. 그럴 수는 없어.' 가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부산은 이제 그만,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시장과 시어머니와 남편의 굴레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울로 가야 한다. 부산에 올 때는 어머니와 의논을 할 수 있었지만 서울로 가는 문제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나올지 무섭고 두려웠다. 급발진 대마왕, 왕빌런, 분조장(분노조절장애)시한폭탄, 인간발암물질, 또 없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그 이름, 남편밖에 없었다. 남편이 어머니께 우리를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깡짜를 부리면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그럴 때는 악당의 면모가 도움이 됨) 남편만 설득하면 된다. 그런데 말이 한 톨도 안 통하는 저 벽창호를 무슨 수로 설득한단 말인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일 예배 시간이었다. 목사님께서 아이들의 진로와 입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예화로 팝페라 가수 임형주 씨 이야기를 했다. 임 씨의 예원 학교 성악과 입학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맞아, 예원학교가 있었지.' 예원학교 라면 서울로 갈 수 있는 구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솜이(딸)는 초등학교 때 별명이 리틀피카소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5살 때 벌써 가운데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 였다. 그 때부터 6학년이 될 때까지 변함없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일찍이 미술 전공으로 진로를 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지 자식 잘 되는 거를 마다할 리는 없겠지.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장황하게 설명했다간 바로 퇴짜를 놓을 것이다. 진지하게 의논을 하면 안된다. 나는 간을 한 번 슬쩍 본다는 생각으로 지나가는 말 하듯이 최대한 가볍게
우리가 "서울에 살았다면 솜이를 예원학교에 보냈을 건데..." 라고 해 보았다. 남편은 대뜸 "지금 가면 안되나?" 하는 게 아닌가?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솜이가 하기에 달린 것 아니겠냐고 했더니, 다짜고짜 "그럼 애들 데리고 서울 가라" 했다.(천하에 악당도 깨갱하게 만드는 미친 교육열)할렐루야! 놀랠루야! 남편은 자기가 먼저 나서서 이사 문제를 어머니께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우리의 더부살이 5년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솜이 다닐 입시 학원을 알아보고 최대한 그 근처에 집을 구했다. 이사 날을 잡고 심지어 내가 서울에 가서 일 할 수 있는 직장까지 정했다. 이사가 결정되고 어머니도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별 말씀을 안 하셨다.
5년이 잠깐이었다. 5년 동안 견디기에 녹록치 않은 일들이 많았지만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넘치는 귀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는 학원을 다니지 않은 친구들이 이외로 많아서 우리 아이들이 방과 후에 어울려 놀 친구가 없을까 봐 걱정할 일이 없었다. 딸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터에서 놀던가, 아니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우리 아이들은 부산 친구들이 순수하고 정이 많다고 했다. 얼마나 순박하고 정이 많은지 솜이가 전학 가는 날 솜이네 교실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고 했다.(실화임)
어른도 아이들 만큼이나 정이 깊었다. 나와 알고 지냈던 집사님은 내가 서울로 간 뒤 3 일을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 아들도 부산에서 친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친구와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아들은 왜 또 서울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어머니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지런함과 희생정신에 입이 다물어졌다.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으로 일군 터전은 우리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 진심으로 어머니께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다.
시장에서 어머니와 남편과 얽혀서 하루하루 전쟁 같은 날을 보내며 그동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내면을 짐작하게 된 것도 커다란 소득이었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책임감과 강박에 가까운 수고와 노력은 자녀들을 주눅 들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강한 겉모습 뒤에 감춰진 불안과 두려움이, 자녀들을 불안해 하거나 소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걱정이 많은 사람으로 만든 건 아닐까?
이놈의 남편이 능력 있는 홀어머니에게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다가 결혼 후에 비로소 사춘기를 시작했구나. 그렇다면 저 외도 라는 것도 지랄 총량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그래서 이판사판 눈에 뵈는 게 없는 악당이 된 거로군여.
이 인간이 빌런이 아니라 기실은 새장 속에 갇힌 아기 새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당신은 결혼을 계기로 새장 문이 열리자 밖으로 나가려고 날개 짓을 배우지 못한 아기 새처럼 멋 모르고 버둥 거렸구나.
어머니는 과일 가게 벌이와는 상관없이 생활비 외에 일체의 돈을 주지 않으셨는데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시장에서 꽤 많은 수입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내게 생활비 기십 만원, 그 이상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비 외에 일체의 돈을 주지 않으신 어머니 덕분에 나는 과일 가게를 언제고 시원하게 때려 치우고 나올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시장 사장님들이 말한 돈 맛을 알았다면 즉시 결단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용광로 같은 고난으로 인생의 본질을 조금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도 감사 제목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인생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자아 실현이니 머시기니 하는 가치도 먹고 사는 것을 이길 수 없음을,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생각하던 인생에서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이 세상에 완벽하게 좋은 것도 완벽하게 나쁜 것도 없다는 것도, 일일이 나열하려면 손끝이 닳을 것이다.
소소한 이득도 더러 있었는데, 그 중에 과일 장사 답게 맛있는 과일 고르는 꿀팁을 나눠줄 수 있게 된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앗, 수박은 뺄게요. 한길 사람 속만큼 수박 속도 열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거든요. "수박요, 잘 익은 놈으로다가 골라 드릴게요." 하는 말은 구라일 가능성 100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