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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위험한 것 투성이였다

by 분홍소금



우리 시골 마을의 집들은 산을 등지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러나 집을 나와 앞 들을 가로질러 조금만 걸어가면 거기엔 동요 가사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사장과 새알처럼 알록달록하고 매끈매끈한 자갈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강변이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강물은 낮이고 밤이고 한결같이 고운 소리를 내며 흘렀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소녀처럼 재잘재잘 명랑한 소리를 냈고,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 물살이 거칠 때에는 사자같이 어르릉거렸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는 봄이 오면 남자아이들은 해거름에 강에 나가 피라미를 잡았다.(꾀가 많은 우리 오빠가 제일 많이 잡았다.)

피라미는 조림이 되거나 튀김이 되어 푸성귀 일색의 밥상에서 20프로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었고, 낮 시간에 엄마와 딸들이 잡은 고둥(내가 제일 적게 잡았다.)은 국도 되고 장도 되었다.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이 풍덩풍덩 뛰어들어 와! 시원하다 와! 신난다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멱을 감았다.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근처에서 모래 뜸질을 했다. 해수욕의 개념을 모르던 우리는 그 사람을 보며 별 스럽다 며 입방아를 찧었다.

같은 모래사장에서 한 여름 밤에 동네 남자들이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여서 씨름을 했다. 강은 얼마나 풍성하며 또 얼마나 다정한지 시도 때도 없이 선물을 주는 산타 같았다.



강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전해 내려온 방법으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수 만든 배가 한 척 있었다.

배는 때 묻지 않은 강가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이토록 한적하고 느긋하고 평화로운 마을에는 운명처럼 받아들인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쉼 없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이 고동 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서 때가 되면 읍내에 있는 5일 장에 내다 팔았다. 그 돈으로 시장에서 생필품과 농기구를 사고 읍내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월사금(수업료)을 냈다.



5일 장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배는 강을 건너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보통 때에는 줄 배를 탔다. 배를 타고 이쪽 나루터와 건너편 나루터에 연결된 줄을 당기면 쉽게 건너편으로 건너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장마가 지고 물이 불어나면 줄 배를 탈수가 없었다

해마다 여름에 장마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장마가 지면 삽시간에 불어난 강물은 성난 황소처럼 황토물을 우르르르 사정 없이 쏟아냈다.



불난 끝은 있어도 물난 끝은 없다는 말처럼 성난 물살은 물에 잠긴 것은 무엇이든 쓸어 갔다.

물살을 타고 지붕이 떠내려가고 돼지와 송아지와 암소도 맥 없이 둥둥 떠내려 갔다.



그러다가 장날이 오면 황토물의 붉은 기가 가시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배를 타고 장에 가려 했다. 물이 빠지면 안전한 줄 배를 타고 가면 되련마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급한 사정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월사금을 기한 내에 마련하려면 그 장날에 소도 팔고 돼지도 팔고 닭도 팔아야 했다.

집에서 앓고 있는 환자의 약도 사야 하고 썩기 전에 푸성귀도 내다 팔아야 했다.

다음 장이면 늦을 것이다.



물이 불으면 줄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사공은 나루터가 아닌 사람들이 다니는 길 끄트머리에 배를 대고 대나무 삿대로 노를 저어 건너편으로 건네 줄 참이었다.

사공은 배를 띄웠고 시끄럽기 짝이 없는 사람들도 그런 날은 입을 꼭 다물고 배를 탔다. 시뻘건 물은 금방이라도 배를 뒤집어 버릴 것 같았지만 겁을 집어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오빠, 그 때 동네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 배를 탔을까요?

-안타면 안되니까 탔지.

-실은 나도 그 배를 탄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내릴 때까지 배가 뒤집히면 어쩌지어쩌지? 하면서 완전 쫄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도 너는 소하고 같이 탄 적은 없잖아?

-닭 하고는 같이 탄 것 같아요.



-나는 소 두 마리에 사람 열 댓 명이 같이 타고 간 적도 있어. 딱 봐도 과적이라.

-소 두 마리라고라고라?



-배 앞 뒤, 양쪽에 한 마리 씩 실었어. 주인이 소의 코뚜레를 단단히 쥐고 옆에 서서 지키는 거지.

-소가 가만히 있나요? 한번만 펄쩍 뛰어도 배가 뒤집힐 건데

-소가 영리해,그 정도 상황 판단은 할 줄 알아. 날 뛰지 않지만 움찔 할 때는 있어. 소가 움찔 하면 배에 물이 들어와, 그럼 거기 탄 사람들이 물을 퍼냈어. 무섭지, 소가 움찔하면 나도 간이 콩알만 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배에서 내리면 그때 휴우 살았다 했지.



-사람들이 왜케 개념 없이 막무가내였을까요? 요새 말로 안전 불감증 끝판왕 아닌가요?

-사람들이 무작한 거야 말해 뭐해, 그래도 최소한 믿는 구석은 있었어,

사공이 잘했어. 그 사람이 물길을 잘 알았거든, 강의 어디 쯤에 물살이 센지, 어디에 대면 안전한지 도가 통한 사람이었지.



-그래도 내가 거기서 살아 남은 게 기적 같다니까요.

-하도 엉성스러워서 (무지막지해서 떠올리기도 싫은)그런 이야기 별로 안하고 싶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강에 다리를 놓았다. 동네 사람들이 한 집에 한 사람 씩 날마다 나가서 부역을 했다. 철근으로 다리 발을 세우고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반죽을 들이부어 굳힌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였다. 다리가 놓이자 동네 사람들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비가 웬만큼 와도 마음을 졸일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장날이 아니어도 읍내나 인근 도시에 자유롭게 다녔고 청년들도 밤에 읍내에 까지 원정을 가서 놀고 왔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다리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난간이었다.

난간이 없는 다리를 생각하면 걱정 하나가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엄마, 아부지가 장에 갔다가 술에 취해서 비틀비틀하다 발을 헛디뎌서 강물에 빠지모 우짜노?

-우째, 죽어삐는 기지

-으응?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버지를 포함해서 우리 동네 어떤 술꾼도 발을 헛디뎌 강에 빠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엄마가 그리 말한 것은 아무리 술에 취한 사람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조심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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