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샬롯의 거미줄)시골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집집마다 돼지를 키웠다. 돼지는 주로 딩기 ('겨'를 통칭하여 부르던 말)를 먹였는데 딩기가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돼지에게 충분히 배부를 정도로 줄 수가 없었다. 딩기를 아끼려고 설거지 한 물에 채소나 반찬 찌꺼기, 생선 뼈 등을 대충 섞어서 구유에 부어 주었다.
돼지도 사람처럼 하루 세 번을 먹었다. 식사 시간에 사람들이 밥을 먹은 소리가 나면 자다 가도 벌떡 일어나 꿀꿀 댔다. 저놈의 돼지가 때를 사람보다 먼저 알고 밥 달라고 우는 거 봐라, 하면서 숭늉 찌꺼기나 설거지 한 물을 부어 주었다. 돼지가 이것저것 배불리 먹은 날에는 돼지 마구 한 쪽의 왕겨나 지푸라기 위에서 늘어지게 잠을 잤다. 하지만 양이 안 차면 더 달라고 한참을 시끄럽게 꿀꿀댔다.
아무리 꿀꿀 대봐야 다음 끼니 때까지는 못 먹을 줄 알고 돼지는 그만 포기하고 누워 잠을 잔다. 돼지가 깨서 시끄럽게 굴 까봐 돼지 마구 옆을 까치발을 하고 조심조심 지나가면 돼지는 사람 지나가는 것을 금세 알아채고는 발딱 일어나서 또 꿀꿀거렸다. "엄마, 돼지가 귓구멍이 왜 저리 밝노? 시끄러워 죽겠다." 하면 "지도 묵고 살라고 그런다." 했다.
돼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당연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특히 어른들이 일하러 나가고 없을 때는 아이들이 도맡아 했다. 돼지는 사람들이 밥 먹는 소리가 나면 끼니 때가 된 줄 알고 밥을 줄 때까지 집요하게 꿀꿀거렸다.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언냐, 나는 돼지 꿀꿀거리는 소리가 왜 그리 시끄러운지, 돼지 좀 안 키우면 안되나 할 정도로 싫더라고.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땜에 꽤나 시달렸던 것 같아.
-근데 돼지 땜에 내 만큼 시달린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캐라.
-맞아, 언니는 돼지우리에서 뛰쳐나와서 도망가는 돼지 잡으러 다니느라고 고생 바가지로 했잖아.
-학교 갔다 오면 돼지 마구에 가서 돼지가 있나없나 먼저 확인을 했지.
-그렇구나
-엄마가 학교 갔다 와서 돼지마구에 돼지가 없으면 찾아서 넣어라 했거든, 근데 우리에 돼지가 없으면 비상이지. 울상을 해 가지고 그때부터 사방에 찾으러 다니는 거지.
-돼지가 왜 우리에서 나오고 지랄을 했을까?
-배가 고프니까 먹을 거 찾으러 나가는 거지, 돼지마구 울타리 밑를 파 디벼서 쏠랑 빠져 나와버리는 거야
-맞아, 돼지가 힘이 셌잖아. 그때는 염소도 그렇고, 가축들이 왜 그리 힘이 셌는지 몰라
-몸에 좋은 걸 먹어서 그런가? 사료 같은 거 안 먹고 유기농 찌꺼기만 먹었으니까
-돼지가 어디로 도망을 간 거야?
-돼지가 뒷산 00댁 헌 집터에서 흙을 파 디비고 있더라고.
-땅 속에 벌레를 잡아 먹었을까? 굼벵이 같은 거?
-몰라, 흙을 먹었는지 벌레를 먹었는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네. 돼지를 발견하고는 작대기를 가지고 돼지한테 가서 "너거 집에 들어가, 너거 집에 들어가"하고 돼지를 쫓아, 돼지가 머리가 좋잖아. 이놈의 돼지가 아이라고 무시하면서 내 말을 안 들어, 돼지마구로 안 들어 가고 산으로 올라가 버렸어.
-돼지는 원래 말 안 듣잖아 절대로, 어떤 사람은 말 안 듣는 남편을 돼지에 비유 하더라구
-몰라, 하여튼 돼지가 산으로 가면 나도 작대기를 들고 돼지를 따라 산으로 갔어. 돼지가 말을 안 듣고 자꾸 엄한 데로 제멋대로 가버리니까 울고불고 거의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봐야지. 돼지를 우리에 못 넣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범벅이 돼서 어린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던 게 아닌가 싶어.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돼지를 쫓아가면서 "제발 너거 집에 들어가" 하는 거지
-돼지가 언니를 갖고 놀았구만
-응? 근데 한참을 돌아다니던 돼지가 결국은 산에서 내려와서 저거 집에 들어 갔어
-다행이다. 애가 좀 착하네.
-돼지가 착하거나 내가 불쌍해서 들어가 준 게 아니라
지도 지친 거지, 힘이 빠지니까 할 수 없이 저거 집으로 들어간 거야.
-아이구 언니 돼지 꽁무니 따라다니느라고 돼지보다 더 힘 빠졌겠다.
-힘든 줄은 몰랐던 것 같은데. 돼지를 몰아서 우리에 넣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거든.
-처음부터 돼지가 돌아 댕기다가 지치면 알아서 들어가게 가만 냅 둬 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근데 그때는 돼지가 돼지마구에 없으면 비상이라? 그런 태평한 마음이 안 돼지
-왜 어른들은 그런 중차대한 일을 아이들한테 맡겼을까?
-어른들은 일하고 밤중에 집에 오니까 낮에 집에 있는 내보고 하라캣지.
-언냐 진짜 고생 많았다. 근데 언냐, 돼지 몰이에 대한 교훈 같은 거 없을까 ?
-무슨 교훈? 무슨 교훈 강박이가?
-응
-우리 애들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구석기 시대 이야기처럼 생각하더라고. 사실 50년 정도 밖에 안된 이야기다. '먹어서 죽는다' 하는 수필도 있더라마는, 못 먹어서 난리였던 때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잖아.
이런 일들을 겪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잘난 척을 할 수 있나 싶다.
우쭐할 일이 생겨도 내 속에 깊숙이 숨어 있던 돼지몰이 할 때의 어린 내가 나한테 이렇게 속삭이는 게 들려.
"너, 까불지 마라, 언제부터 그리 잘 먹고 잘 살았니?
9살10살 때 돼지 꽁무니 따라 다니던 일을 벌써 잊어버렸니? "
사람이 올챙이 적 일을 잊어버리고 마치 흙수저가 아니었던 것처럼 나대면 쓰나, 우리가 어려운 시절에 배운 것을 교훈 삼아 항상 겸손해야지 하고 한번 더 나를 추스른다고나 할까.
언니의 말처럼 언니는 부지런하고 겸손하다.
나는 언니에 비하면 입만 살아서 나불나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