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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2)

by 분홍소금


(고향 시골마을 입구의 정경)

고향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 때,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한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 라는게 무색하게 기억이 새록새록 새롭다.

요새 아이들의 하루 일과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에 아이들이 감당했던 일과는 요즘과는 차원이 달랐다.

두뇌 노동과 육체 노동의 차이 이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속사정은 약간씩 달랐을지 모르겠으나 모두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누릇누릇한 초가집에서 누릇누릇한 얼굴을 하고 밥상에 매 끼 올라오는 노리끼리한 된장을 먹고 살았다.

사람들이 집에는 키우는 가축들도 죄다 누랬다.(흑돼지와 흑염소는 예외)

노란 황토 흙이 다져진 마당에서 누렁 송아지와 어미 소, 누렁이 똥개, 노르스름한 암탉과 노란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를 키웠다.

황색이 대세인 시대였다.(차마 똥색 시대라고는 말 못함)


아이들도 코흘리개 시절부터 노릿노릿한 얼굴에 누런 코를 달고 일을 했다. 그것도 아주 빡시게.

농사일도 도왔지만 집안일을 많이 했다.

방과 마루를 소제하고 빗자루로 마당이나 쓸었겠지 하면 오산이다.
소제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도 벌렁벌렁 해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책보를 마루에 던져 놓고 돼지와 소와 강아지 밥을 챙겨주었다 (고양이와 닭은 셀프 해결) 징징거리는 동생을 업어주고 달래주며 틈틈이 걸래도 빨고 빨래도 하고 고무신도 하얗게 씻어 놓고 해거름엔 보리쌀도 삶았다.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콩나물도 무치고 콩나물국도 끓였다.

여름에는 소 먹이러 산에 가고 겨울에는 소죽을 끓이고 땔감으로 쓸 나무도 해다 날랐다.

자질구레한 일까지 다 쓰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오죽 했으면 낮에는 공부할 시간조차 없다고 했을까.



숙제는 밤이 돼야 할 수 있었다. 누군가 호롱불을 켜면, 그 밑에 엎드려서 학교에서 내 준 숙제를 했다. 그런데 호롱불마저도 오래 켜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호롱불을 켜고 30분만 지나도 시커먼 그을음이 방안에 가득 찼다. 사실 그을음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는데 그건 "기름 닳는다, 빨리 불 끄고 자라." 는 엄마의 폭풍 잔소리였다.


어른들에겐 숙제보다 기름 닳는 것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웠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던 우리는 숙제를 짧은 시간에 해 내려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한 눈 팔며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ADHD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게 있었다 하더라도 호롱불 아래에서는 걸음아 날 살려가 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사실 이런저런 노동에 비하면 공부는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쉬웠던가.(지극히 주관적인)



아이들이 했던 집안일 중에 가장 고된 일은 우물물을 길어다 부엌에 있는 물더무를 가득 채워야 하는 일이었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도라무깡물더무는 시멘트와 모래를 이겨서 틀에 넣어 만든 것이었다. (후에 검색 결과 발암 물질 덩어리라는 사실에 맙소사, 깜놀)

물더무는 한 말 짜리 물 양동이로 10통 정도 들어 가는 크기였다.



어른들은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이고 다녔지만 아이들은 힘이 없어서 양동이에 반 정도를 채워서 이고 다녔다.

20번은 왔다갔다 해야 물이 찼다.



물 긷기 미션 수행 중 아주 빡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물을 반 쯤 채웠는데 물더무에 노래기가 빠진 것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파리가 빠져 죽었다면 파리만 건져내고 나면 시치미 뚝 떼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노래기는 냄새가 지독한 놈이라 노래기가 빠진 물은 먹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제껏 물더무에 길어다 놓은 물을 다 퍼내야만 했다.



종종 물동이를 이고 가다가 엉뚱한 상상을 하거나 한 눈을 파는 사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물동이를 인 채 길바닥에 엎어져 버리는 때도 있었는데 그때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이 엎질러지고 무릎과 손바닥이 쓸리고 양철로 된 물동이가 찌그러졌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어릴 때 꿈 중의 하나가 빨리 커서 물지게를 지는 것이었을까?

어른이 물지게로 물을 나르면 내가 20번을 이고 나르던 것을 5번 만에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언냐, 우리 양철 물동이가 성한 기 없었제?

-니도 내옹치고(처박다) 나도 내옹치고, 너나 나나 어설퍼서 처박기 일수였지 뭐

-언니도 물동이 많이 이고 다녔제?



-나는 00아지매 집 물도 길어다 주었으니까.

-00아지매가 다리를 절룩거리고 걸었던 게 기억이 나, 근데 동네 아이들이 천지인데 왜 하필 언니가 했노?

-엄마가 00아지매 집 것도 하라고 시켰다.

-참나


-내가 물을 이고 가면 00아지매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몰라.

내가 시집갈 때 자기 집에 있는 솥단지를 떼서 내한테 줄거라고 했을 정도였다.

-아니, 새로 사준다 캐야지, 자기 집에 쓰던 것을 왜 떼준다 캐?


-그때는 워낙 가난해서 사 준다는 건 생각은 못한 거지. 사준다고 하는것이 비현실적인 거지.

아지매가 무쇠솥을 반들반들 닦아 놨더라고. 그렇게 귀한 거를 널름 준다 캤다니까

-울컥하는구만, 언니가 진짜 고마웠나보다.

-근데 언니 시집갈 때는 이미 돌아가셨었잖아.

그 아지매 살아 계셨다면 언니, 무쇠 솥 갖고 시집갈 뻔했네.



쌀 독에서 인심 난다고,가난한 동네에 인정이라는 것이 참 귀했다.

씨족 동네라 옆집도 친척, 건넛집도 친척, 친척들이 우글우글했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다들 다정하거나 친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어머니, 작은 할머니,5촌 아지매, 등 친척 어른들은 우리가 눈에 띄기만 하면 불러다가 일을 시켰다. 나와 언니는 무례하고 인정 머리 없는 친적 어른들을 피해서 빙빙 둘러 다니거나 논둑 뒤에 숨어 다녀야 했다.



그런데 00아지매는 친척이랄 것도 없는 먼 일가임에도 거의 유일하게 다정한 분이었다.

남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라 그랬을까 싶기도 하기만 그 어른에게는 진심이 묻어 나는 따뜻함이 있었다.

언니 뿐 아니라 나도 가끔 가서 마루를 닦아 주거나 마당을 쓸어 주면 세상에 세상에 하며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절에 물동이로 물을 이고 나르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고생하는 엄마를 돕는다는 생각에 물더무에 물이 차오를 때 뿌듯한 마음도 함께 차 올랐고, 00아지매가 고맙다고 대견해 하실 때는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혼자서 속으로 우쭐하곤 했다.



어려운 농촌 살림살이와 어른들의 일손 돕기가 늘 힘들기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 맡겨진 일을 해내면서 무럭무럭 성장했고 힘들었지만 아무도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돌아보면 세상 일이란 다 나쁜 것도 다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빠 보이지만 좋은 것이 있고 좋아 보이지만 다 그런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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