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젊었을 때의 모습, 일러스트 by 솜)
'나는 문명과는 동떨어진, 농사짓고 길쌈하고 호롱불 켜고 바느질하고 사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다.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 었으니 요샛말로 하면 결손 가정이었다. 부족한 것 천지였다.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이 쓰신 글들을 모아 놓은 책 '노란집'에 있는 글이다. 나는 선생님 때 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에서 살았지만 농사와, 호롱불, 산골 벽촌,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함은 내가 어렸을 적에 살던 고향에서도 그대로 였다. 부족한 것 천지인 것도 공통점이다. 선생님은 넉넉한 건 오직 사랑이었다,하셨는데, 우리 고향 마을엔 사랑은 넉넉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넉넉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었다.
앞집 옆집 건너 집에서 넘치도록 풍성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욕설이었다. 입 달린 사람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 마디 씩 할 줄 알았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형제들끼리 혹은 아이들끼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내뿜고 다녔다. 아무 욕 대잔치의 시대였다. 이놈 저놈 이년 저년은 욕 축에 끼지도 못했다. 대화를 시작할 때도 욕으로 시작했고 대화 내용도 고기 반 물 반 처럼 욕설이 반이었다.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은 늘 집안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들도 집안 일, 농사 일을 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동생을 돌보는 것 뿐 아니라 논일 밭일 까지 했고, 소 먹이기 처럼 아이들이 도맡아 하는 것도 있었다. 가족은 노동 공동체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손끝이 야무지다는 칭찬을 들으며 어른이 하는 일도 척척 잘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이 손에 익지 않아서 어설프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어리버리한 사람을 찾으라면 슬프게도 그건 바로 나였다. 뭐든 내 손에 들어오면 남아 나는 게 없었다. 요즘에 누군가 그랬다. 마이너스의 손 이라고
물동이를 이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물동이가 찌그러져 버렸을 때는 무릎이 까진 것보다 물동이 찌그러진 것이 더 속상해서 서럽게 울었다. 비우려고 들고 가던 요강이 축담에 걸려 깨져 버리기도 했다. 엄마의 입에서는 손 모가지(손목)가 비틀어졌나, 눈 꾸녕(눈)은 어따 빼놨냐 부터 시작해서 또 지랄용천한다, 빌어물 년(빌어먹을 년)까지 튀어 나왔다.
그런 일이 있으면 깨 먹지 않으려고 더 긴장하고 조심했다. 시험 칠 때 안 틀리려고 너무 긴장하면 아는 문제도 틀리듯이 조심하면 조심할수록 내 손안에 있는 것들은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와장창와장창 보기 좋게 난리가 났다. 국이 엎질러지고 접시가 깨지고 밥이 쏟아졌다. 하도 잘 깨뜨리니까 나중에는 " 빌어물 년, 잘했다, 그래야 그릇 장사도 묵고 살 것 아이가" 했다.
고구마 밭, 감자 밭, 고추밭 을 매러 가면 내가 매는 밭 고랑은 여엉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한 고랑 맬 때마다 몇 고랑이 남았나 세어보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게으른 놈이 밭고랑만 센다' 라고 했다.
사실은 기분이 좋을 때도 욕을 했다. 산 밭에 가서 누에를 먹이는 뽕잎을 한 포대 따 왔을 때도 아이구 싸악해라 (장해라) 빌어물년 하하하 이런 식이었다.
한 날은 엄마가 이웃에 사는 아지매와 수다를 떨다가 건너 집 아지매 험담을 했다.
아지매가
-들어보래, 00댁은 애들한테 욕을 해도 우찌 그리 숭악한 욕을 하꼬
-나도 들었다. 00댁은 자슥들한테 육두문자까지 쓴다 카데
-아이구 모질어라
나는 아지매가 간 다음에 엄마한테 낼름 이렇게 말했다
-엄마도 욕 잘한다아이가?
그러자 엄마는
-내가 하는기 욕이가? 그냥 말이지
-그냥 말이 왜 욕 같노?
-빌어물년아이가 씰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소죽 솥에 불이나 때라
어디서 무엇을 하건 욕이 안 들어가면 서운할 정도였지만 내가 중학생이 되자 엄마 입에서 욕설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엄마 왜 욕 안 하노" 하면
"니는 인제 배운 사람이다, 배운 사람한테는 욕을 하면 안된다." 했다.
딸이 대학에 들어 가고 나서 엄마한테 물어 보았다.
-엄마 나는 아직도 솜이 한테 집안일 못 시킨다.
-와? 시키라, 여자는 집안 일 못하면 일류 대학 나와도 소용 없다.
-솜이 하는 것 보면 속에 천불 나서 내가 해치우고 말아버려, 엄마, 어렸을 때 내가 워낙 어리버리했잔아, 내가 일하는 것 보고 있으면 고구마 10개 먹은 것보다 더 답답했을 낀데 엄마는 그걸 우찌 보고 있었노?
-고마, 여자는 집안 일 못 하면 안 된다꼬 생각해서 갑갑해도 보고 있었지
-엄마 참을성 진짜 대단하다.
엄마, 엄마 덕분에 먹고 사는데 필요한 일은 다 배웠다. 내가 엄마한테 욕을 먹으며 익힌 것이 바로 실생활에 꼭 필요한 공부더라고. 그러고 보면 엄마는 실학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기 뭐꼬?
-실학은 실제로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공부를 말한다. 말하자면 엄마가 내한테 욕하면서 시킨 거,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나무하고 불 때고 면사무소 가서 일 보는 것을 가리킨다.
-시레기라고?
-아니 실학, 실학은 조선시대 말에 실학자들이 주장했다. 탁상공론 그만하고 조선도 실학을 해야 된다꼬 했지. 내 생각에는 대한민국에 실학이 아직도 제대로 안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원에서 죽어라 공부하는 영어 수학이 실생활에 쓰임새가 별로 없거든. 그런데 그걸 엄마가 해냈다.
-야가 뭐라카노?귀신 씨나락 까 묵는 소리 고마해라.
그 대화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신산했던 삶을 뒤로 하고 농사 같은 것은 안 지어도 되는 곳으로 돌아 가셨다.
교양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자식들을 존중해 주는 척 하면서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시키는 드론 엄마보다 실학을 몸소 실천하신 우리 엄마가 백 배 천 배 훌륭하시다고 덧붙였어야 했는데 그 말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