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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재 미첼 MJ Mitchell Mar 15. 2022

시 詩 - 회화나무 점빵

민재미첼

회화나무 전빵


민재미첼


오래된 기억이 내 눈을 콕콕 쪼는 시간

어둠이 무럭무럭 자라던, 정말

회화나무였을까 느티나무였는지 몰라

없었다 해도 상관없어 외갓집에

나를 맡기고 돈 벌러 갔는지

엄마의 내일은 아직도 멀었지

할아버지보다 더 늙은 집 뒤란에 앵두가 열리고

봉숭아 수국이 아무리 고와도 회화나무

점빵 아제 머리 위에서 팔랑이는 초록 잎들

깜박일 때마다 바람이 불었고

나무 그림자 바람이 익숙하게 잡아 늘리면

어느새 달큰한 밥 냄새가 노을처럼 울컥 붉었지

국수를 미는 할머니 머리 위엔

안개같이 눅눅한 밀가루가 쌓이고

밥 무근나 묻는 회화나무 점빵이

진짜로 있었는지 내가 정말

엄마를 그토록 기다렸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회화나무 한 그루, 점빵이 있었지


(인간과 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작)


Full Moon Over The Valley (acrylic painting) by Mj Mitchell


나를 만든 달


민재미첼


근육으로 단단해진 달이

구름을 마악 비껴갈 찰나였지

너무 붉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

모서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란 달이

심심풀이 화투점 치던 엄마 등 뒤로 박혔어

솔 매화 벚꽃 난초 나란히 줄 세우며

달이 아무리 밝아도 눈은 어두워

화투장 안 보인다며 혀를 끌끌 차고는

이쯤 살았으면 명줄만큼 산거라며

패를 뒤집다 말고 손금을 들여다봤지

모란 국화 단풍 오동 갈라놓듯

기억을 가만가만 가르고 있는지

어깨너머 화투패 훔쳐본 달은

술 향 가득한 국화를 밟고 섰어

엄마는 어깨에서 조금 미끄러진 달을 흘기고

밤이 명줄만큼 길다고 투정을 했지만

가만 보니 달도 이젠 순하게

부풀었던 근육에서 바람을 빼고

엄마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던 거야.


(인간과 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작)


적당한 거리


민재미첼


사방 연속무늬 모란 몇 송이를 깔고 앉았어

모란이야 얼마든지 자라니까 신경 쓰지 마

모퉁이로 갈수록 더욱 화려한 공간

세계일주 준비치곤 어설픈 축에 들지도 않아

어차피 완벽한 계획은 세상에 없으니까 다행이야

날짜 변경선에 하나 둘 걸린 노랑 메모지들

도대체 외워지지 않는 낯선 단어들

땅과 땅 물과 물 사이 파고들어 노랗게

언제 남겼는지 기억할 수 없는

적당한 거리는 어디쯤일까

수없이 많은 빨갛고 파란 선들

점으로도 안 찍히는 동네

모란이 피는 정원은 어디쯤일까

이 끝과 갈 수 없는 저 끝의 거리

적정한 용도로 쓰여 본 적 없는 단어들

세상 어딘가에서 정말 쓰이기나 하는 걸까

곰팡이가 지구 정복을 꿈꾸는

여기는

똑같은 모란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세상과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는

빳빳하게 코팅된 표준행정 세계지도


(인간과 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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