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끼는 사람과 모호한 사람은 얼핏 닮아 있다.
쉽게 단정하지 않고, 쉽게 선을 넘지 않으며,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호한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착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말을 아끼는 사람은 신중한 사람이고, 모호한 사람은 책임을 미루는 사람이다.
모든 유보가 회피는 아니다.
신중함은 판단을 늦추지만, 모호함은 판단 자체를 흐린다. 반복되는 모호함은 태도가 되고, 그 태도는 종종 책임 회피로 이어진다.
“생각해 볼게”는 대답이 아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은 팀 동료에게 고쳐주었으면 하는 점을 조심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따지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고 싶었다.
동료의 대답은 짧았다.
“응, 생각해 볼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적어도 내 말을 이해했다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돌아온 말은 같았다.
“응, 생각해 볼게.”
그제야 알았다.
생각해 본다는 답변은 대답이 아니었다. 대화를 끝내는 방식이었다.
생각해 본다는 말은 이상하리만큼 편리하다. 거절은 아니지만 거절과 같은 효과를 내고, 상대를 완전히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교묘하다. 말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정말 생각은 해봤을 수도 있으니까.
네 편도 내 편도 아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있었다. 어느 해 여름, 같은 무리 안에서 갈등이 생겼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이야기가 오갔고, 그 자리에 그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그 친구는 그 상황을 어떻게 봤는지.
친구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어. 양쪽 다 이해가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 말이 성숙하게 들렸다. 섣불리 편을 가르지 않고, 감정보다 상황을 먼저 살피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한 번의 태도가 아니었다.
친구는 늘 모든 말을 들었고, 늘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친구의 태도는 어느 쪽에도 밉보이기 싫어서 내린 선택에 가까웠다.
중립은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자세에 불과하다. 끝까지 자기만 다치지 않겠다는 태도는 멀리서 보면 침착함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겁함이다.
분명히 말했는데, 끝내 분명하지 않았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가 한 말을 나중에 바꾸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일을 맡아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다음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며칠 뒤 일이 어그러지자 그들은 말했다.
“제가 괜찮을 것 같다고 했지, 확실하다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분명히 된다고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문제가 생기자 그들은 오히려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패턴이 보였다.
그들의 대답 속에는 늘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성격 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하게 말하면 책임이 생기고 모호하게 말하면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모호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끝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회의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자주 봤다. 의견을 물으면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다”라고 하고, 방향을 정해야 할 때는 “조금 더 열어두자”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신중한 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보고, 조금 더 열어두고, 조금 더 생각하다 보면 결국 누군가는 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싫은 소리를 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모호한 사람들은 마지막 지점에서 늘 한 발 물러선다.
확실히 말하지 않으면 틀렸다는 말도 들을 일이 없다.
입장을 정하지 않으면 책임질 일도 생기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결과에 대해서는 언제든 한마디 얹을 수 있는 자리.
세상에는 그런 자리도 있다.
모호함이 남기는 것
모호한 답변은 직접적인 거절이 아니기 때문에 노골적인 다툼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러나 모호함이 불러온 의구심은 오래 남는다.
왜 자기가 한 말을 다르게 기억할까.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끝난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을까.
나는 지나치게 모호한 사람을 경계한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 나중에 말을 바꾸는 사람, 결론이 필요한 순간마다 한 발 물러서는 사람.
그들은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지는 못한다.
갈등을 없애는 대신, 책임의 윤곽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