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기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두 사람의 영웅을 만났다. 하나는 베트남의 주석이었던 호찌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세로부터 베트남을 지킨 군인이었다. 이 두 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음이 훈훈해졌다.
- 베트남의 주석 호찌민
우리가 들어선 곳에는 너른 광장이 있고 그 건너편에 높게 선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의 입구에 제복을 입은 경찰이 반듯하게 서 있는 호찌민의 묘지다. 호찌민은 죽을 때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당부했다는데 이렇게 웅장한 묘지를 만들었으니 그의 뜻과는 정 반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베트남 국민이 호찌민을 그만큼 존경하는 증거’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건물의 좌우 양편에는 묘지 높이의 절반 정도 되는 담벼락이 서 있는데, 거기에는 좌우로 길게 쓴 표어가 게시되어 있다. 좌우의 길이가 50m 이상 될 듯하다. 호찌민의 넋을 기리고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는 글이라고 한다.
묘지 앞 광장을 크게 돌아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호찌민 유적지가 나온다. 입구에 검색대를 설치해 놓고 지나가라고 한다. 좀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찌민 유적지
호찌민은 1954년 12월부터 1969년 9월까지 15년 동안, 베트남을 통치한 주석이었다. 그가 당시에 기거했던 건물과 사용했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 바로 호찌민 유적지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 주석부 건물이 보인다. 옛날 프랑스의 전권부 건물이라 그런지 프랑스 특유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아담하면서도 절제된 외형의 건물이었다.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 100M 이상 떨어진 곳에서 가이드의 설명만 들었다. 호찌민 주석이 외부 손님을 맞이했다는 ‘꽃발판’은 주석부 건물 뒤편에 있고, 각종 회의를 주최하고 국빈을 영접했다는 ‘정치국 회의실’은 주석부 건물 내부에 있어서 볼 수 없었다. ‘프랑스의 잔재이니 건물을 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국민에게 ‘이것도 베트남의 재산’이라고 설득했다는 호찌민, 그의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주석부 건물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가정집 형태의 건물이 또 하나 있다. ‘제54호 방실’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호찌민의 사저였는데, 가족이 없는 호찌민에게는 너무 커서 나중에 ‘1954집’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총각 호찌민에게 결혼하라는 주위의 권유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베트남과 결혼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베트남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가이드는 누차 소개했었다.
프랑스군이 침략했을 때 전기공의 집이었다는 ‘1954집’은 1954년부터 1958년까지 호찌민의 사저로 사용된 집이다. 이 집의 내부 곧 사무실과 침실을 공개하고 있었다. 사무실의 크기는 우리나라 서민 아파트의 거실과 비슷한 규모였는데, 거기에는 학생용으로 보이는 책상과 의자, 책 몇 권이 꽂혀 있는 작은 책장이 놓여 있다. 침실에는 목재로 된 침대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탁자와 전기스탠드가 놓여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전화기가 놓여 있고, 모자도 전시되어 있었다. 호찌민의 검소했던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유주의를 배격한 자, 과격한 공산주의자로만 생각했던 호찌민,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의 절제된 생활 태도는 베트남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었고 분단되었던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을 듯하다. 그의 인물 됨됨이에 자꾸만 고개가 숙여진다.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한 베트남, 경제적인 면에서 우리나라보다 뒤져있지만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된 것은 단연코 호찌민의 인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베트남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 밝았고, 생활하는 모습도 활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베트남 국민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울창한 망고 거리와 자그마한 호수, 그 주변의 나무 등도 좋은 관광자원이다. 연못가에 서 있는 나무, 뿌리가 위로 솟은 특이한 붓(but)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