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고무줄놀이할래? 종이 인형 놀이할래? (하)

아듀! 언젠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by 홍반의 서재

언젠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삐삐 언니의 집은 라일락 나무가 있는 우리 집과는 달리 넓디넓은 정원에는 키가 큰 은행나무 서너 그루가 줄지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그 은행나무들을 그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뗐다.


“우리 집은 라일락 나문데...”


“그러게... 너네 집은 마당 한가운데 엄청 큰 라일락 나무만 있더라. 근데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은행을 엄청 좋아하셔서 이렇게 은행나무만 잔뜩 심으셨어.”


“왜에...?”


“왜긴... 은행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은행들을 주워서 깨끗이 씻은 후 기름에 소금 넣고 달달달 볶으면 짭짤하고 고소한 맛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가 은행을 엄청 좋아하시거든.”


순간 나는 기름에 소금을 넣고 달달 볶은 은행의 맛이 궁금해져서 “그럼 나도 하나 먹어 볼 수 있어, 언니?”


입맛을 다시며 묻는 내게 언니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나 좋아하는 맛이야, 꼬마인 네가 먹기에는 아마도 맛이 없을 걸...?”


삐삐 언니의 말에 다소 의기소침해져 있던 내게 그녀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혹시 배고프지 않아?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그나저나 너 라면 좋아해?"


당시에 나는 라면을 그다지 많이 먹어보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나를 위해 늘 손수 요리를 해서 정성껏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면을 그다지 먹어 본 기억이 없어서였다.


나는 그 언니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으응. 나도 라면 엄청 좋아해.”


나의 들뜬 대답에 삐삐 언니는 활짝 웃으면서 거실 소파에 잠시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주방으로 급히 들어가서는 물을 올리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서는 보지 못했던 짙은 그레이 계열의 가죽 소파 위에는 손수 뜨개질을 해서 만든 방석들이 대여섯 개가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우리 집과는 결이 많이 다른 그 언니의 집에 적잖이 놀라긴 했지만... 그보다는 라면이라는 것에 꽂혀서 침을 꼴딱 꼴딱 삼키기에 급급했다.


곧이어 삐삐 언니가 "꼬마야, 어서 주방으로 와."라고 말하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급하게 그 언니가 서 있는 주방이라는 곳으로 다가갔다.


진한 갈색 빛이 감도는 큰 나무 식탁 주변에는 의자들이 서너 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궁이와 무쇠 솥과 부지깽이가 있는 우리 집 부엌이라는 곳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곳은 왠지 지상낙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신식인 그 집에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묘한 열등감을 느꼈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낡은 한옥집 보다 족히 몇십 배는 좋아 보이는 삐삐 언니 집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 우리 집은 상대적으로 볼품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 기분과는 별개로 언니가 끓여준 라면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엄청 뜨거워서 호호 불며 조금씩 집어서 입안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어서 음미했다.


먹는 내내 나는 라면에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내 생애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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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하고 쫀쫀한 면발이 짭조름한 국물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지금도 그때 삐삐 언니가 끓여주었던 그 라면 맛이 내 잔상에 깊게 새겨진 최고의 맛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 놓인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한 그릇 다 비우자마자,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에 사시는 고모가 보내준 쿠키라며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 과자를 내게 선뜻 내어줬다.


나는 해바라기 모양을 한 그 과자 하나를 들어 입안으로 가져가자마자 똑 깨물었다. 과자 안은 초코가 가득 들어있었는지 한입 베어 문 그 사이로 초코크림이 입안으로 달달하게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살짝 감고는 천상에서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그 맛에 잠시 흠뻑 취했다.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은 그 초코크림의 맛은 단연코 최고였다.


삐삐 언니는 그런 나의 모습이 웃겼는지 갑자기 자신의 배를 움켜잡고는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음식에 흠뻑 취해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한껏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는 내게 언니는 물었다.


“이제는 배도 부르니까 내 방에 들어가서 인형놀이나 할래?”

“응.”


삐삐 언니는 나의 작은 손을 꼭 잡고는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방안은 온통 핑크 물결이 넘실거렸다. 언니의 외모(?)와는 다르게 방 안은 그야말로 반짝반짝했다.


나는 살면서 처음 보는 예쁜 방에 잠시 그대로 얼음이 돼서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얼음땡” 놀이에 빠진 아이처럼 그 자리에서 한동안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런 내가 웃겼는지 언니는 나를 살짝 들고는 자신의 방안에 있는 분홍 공주 침대에 앉히며 말했다.


“너네 집은 우리 집 하고는 달라?”

“으응.”

“어떻게 다른데...?”


나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묻는 언니에게 나름 나의 짧디 짧은 단어 실력을 총동원해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그러자 언니는 전부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종이로 된 무언가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이건 선물. 네가 가져.” 라며 내게 뻣뻣한 종이를 건네주었다.


나는 언니한테 건네받은 선물에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받자마자 얼른 뒤집어보니 그 종이는 그냥 빈 종이가 아니라 속옷을 입고 있는 예쁜 공주와 그 공주에게 입힐 수 있는 원피스와 각양각색의 옷들과 신발이 가득 그려져 있는 종이인형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종이인형놀이에 푹 빠져 지냈다. 그렇게 난생처음 선물로 받아 온 그 종이인형을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대청마루 한편 작은 담요 속에 고이 넣어 두고는 틈나는 대로 들여다보며 이 옷 저 옷 갈아입히곤 했다.


종이인형을 선물로 받은 그날 이후부터 나는 완전히 고무줄놀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대문 밖에서 날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언니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자상하던 삐삐 언니마저도 "꼬마야, 고무줄놀이하자."라며 대문 밖에서 나를 더 이상은 불러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나를 불러주지 않는 삐삐 언니에게 그다지 섭섭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도 언니가 바로 내 옆에서 나랑 같이 인형놀이를 말없이 해주고 있는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청마루에 누워서 눈을 살포시 감고는 나의 볼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고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던 나의 일상에 (물론 가끔 정체모를 존재들이 나타나 놀자고 조르던 것 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뜻밖의 존재와 맞닥뜨려야만 했다.


몇 주 후 다시 시작된 언니들의 고무줄놀이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의 옆에는 그 삐삐 언니가 와 있었다.


그 언니는 그저 내 옆에 앉아서 공허한 눈빛으로 마당에서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울부짖는 바둑이와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탉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이 언니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저 생전과 다름없이 대했다.


담요에 고이 모셔두었던 종이인형을 가져와 언니의 옆에서 옷도 갈아입혀주고, 신발도 신겨주면서 “언니 나랑 고무줄놀이할래? 아니면 종이인형 놀이할래?”라고 중얼거리듯 말하면, 마당을 공허하게 바라보던 삐삐 언니의 시선은 어느샌가 나의 종이인형에 박힌 채 그대로 장시간 멈춰 있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가 하는 종이 인형놀이를 지켜보던 언니는 더 이상은 재미없다는 듯이 내게 검은 고무줄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그 고무줄을 잽싸게 받아 들고는 대충 신발을 욱여 신고 그대로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삐삐 언니가 내게 해줬던 그대로 고무줄 한쪽은 전봇대에 묶고 다른 한 손으로는 줄을 잡고 서서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고무줄이 조금씩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서서히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나는 그 언니가 생전 내게 해줬던 고무줄놀이며 종이인형놀이를 해주면서 한동안은 낮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처음에는 자신의 죽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지 날마다 내게 찾아와서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인형을 만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내가 만지는 물건들을 더 이상은 만질 수 없었다.


낯빛은 점점 창백해지더니 파리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검은색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같았다.


공허한 눈빛이 머무는 시선의 끝은 언제나 고무줄과 종이인형이었다. 비록 내가 우리 할머니에게 그 언니가 날마다 찾아온다는 사실을 함구는 하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계셨다.


그 가여운 어린 영이 딱히 자신의 어린 손주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았기에 그냥 그대로 두고 보셨다.


날이면 날마다 나를 찾아왔던 그 삐삐 언니는 더 이상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동네에서는 암암리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 은행나무집 외동딸이 하굣길에 아빠 회사 친구라는 사람의 차에 태워진 채 행방불명이 되었고 그대로 실종신고로 이어졌다는 소문이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생사를 전혀 확인할 길이 없었던 딸이 주검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발견 당시 한 손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검은 고무줄을 꽉 쥔 채로...!


은행나무집 언니는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원혼을 좀 풀어 달라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 쓸쓸하게 놀고 있을 내가 밟혀 잠시 잠깐 동안이라도 나와 놀아주려고 찾아왔던 것이었을까?







얼마 후 누군가가 우리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꼬마야, 문 좀 열어 줄래...?"


대청마루에 누워있던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문 밖에서는 삐삐 언니와 똑같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언니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키가 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그 꼬마였구나, 내 딸이 날마다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고 했던..."


그러더니 잠시 후 "할머니는 안에 계시니?" 하고 다시 물어 오셨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그녀를 할머니 방으로 안내해 드렸다. 방안에서는 두 여인이 잠시 동안 소곤소곤 뭔가를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방 안에서 아줌마가 나오며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고맙다, 우리 딸 가는 길에 쓸쓸하지 않게 해 줘서...!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어르신."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황급하게 나가셨다.


급하게 아주머니를 배웅하고 들어오시던 할머니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아줌마 우리 집에 왜 왔어...?"

"왜 오긴... 예쁜 한복 한 벌 의뢰하러 왔지."

"누구 거...?"

"누구긴... 날마다 네가 놀아줬던 그 아이."


나는 할머니의 말에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앵두나무 집 아이가 내 곁을 슬프게 떠난 이후로 나는 마음속에 단단한 빗장을 만들어 걸어뒀다.


슬퍼도 슬퍼하지도 내색하지도 말자고... 마음속에 굳게 다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삐삐 언니의 한복을 은행나무 집에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의 손에는 그 해바라기 과자 몇 봉이 들려있었다.


내가 그 해바라기 과자를 엄청 많이 좋아했다고 (딸이 생전에) 아줌마에게 말을 해줬다며 할머니 편에 보내셨다.


나는 그 과자 봉지를 받아서는 얼른 뜯어서 해바라기 과자 한 개를 깨물다 말고 이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꾹꾹 애써 눌러 담았던 슬픔이 그만 복받쳐 뻥 터져버린 것이었다. 마음의 빗장은 그냥 허울 좋은 빗장일 뿐... 끽해봐야 나는 고작 어린아이였으니까...!


할머니 품 안에서 한참을 울고 나니 이내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런 내게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 아이가 좋아했던 게 종이인형이야?"

"으응. 근데... 그 언니는 그거 말고도 고무줄놀이도 좋아해... 쿨쩍... 쿨쩍..."

"그랬어? 그럼 문방구 가서 고무줄 하고 종이인형 하나 사 오렴."


문방구에서 고무줄과 종이인형을 사 온 나는 작은 박스 안에 비단 자투리 천을 정성껏 깔고 고무줄과 종이인형을 담았다.


그리고 그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라고 쓰고는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 그대로 묻으며 두 손을 모으고는 기도를 했다.


“삐삐 언니, 이거 가지고 가서 재밌게 놀아.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그동안 나랑 재밌게 놀아줘서 정말로 고마웠어.”


나의 고마움에 대한 자상한 삐삐 언니의 응답이었을까...?


잔잔한 바람이 나의 코끝을 살짝 스쳐 지나가며 라일락 나무의 잔향을 떨구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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