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자."
고등학교 때 내 좌우명이었다.
지금 보면 터무니없는 말 같은데, 그때 나는 진심이었다.
고등학교 때, 시험기간에는 내 노트나 교과서를 친구들이 차례대로 빌려갔다.
아무리 바빠도, 친구들이 질문하면 시간을 내어 답변해주었다.
공부할 때는 하더라도, 놀 때는 종종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애들은 좋아해줬다. 공부잘하는 데 착하다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의 좌우명은 내 욕망을 반영했다.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인정욕구.
모범생, 많은 친구들, 전교 1등, 이런 것들이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대학에 가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나보다 머리가 좋은 친구들도 많았다.
의대의 특성 상 성비가 여1:남4 정도 되었다. 여자는 예쁘지 않으면 관심을 받지 못하겠다 싶었다.
나의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고,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고민했다.
주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해 본 결과, 알게 된 내 장점.
의대생 치고 사교성이 뛰어남,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눈치가 빠르고, 여학생 치고는 술을 잘 마셨다.
이거다! 나의 눈치빠름, 약간의 유머, 음주 능력을 가지고 인싸가 되었다.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혼자 출석하는 빡쎔까지 장착했다.
공부도 빡쎄게 했고, 80명 중에 5등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공부도, 사회생활도 잘하는 의대생, 이런 것들이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서울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을 고를 때에도 전략을 세웠다. 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이 어딜까를 고민했다.
소위 말하는 빅5, 서울대, 세브란스, 서울성모병원, 아산병원, 삼성병원에서는 내가 빛나지 못할 터이다.
전국 의대의 1등들만 모일게 아닌가.
나는 위치는 좋으면서 적당한 네임밸류가 있고, 규모는 작은 강북삼성병원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나는 빛날 수 있었고, 하고 싶었던 신경과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경과도 나름 경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2년차 쯤 되니 여유가 생겼다. 아, 뭐라도 해야 되지 않나?
서울에 와보니, 지방의대 학력을 업그레이드 해야되지 않나 싶었다.
병원에서 가깝기도 하고,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나오신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입학했다.
뭐든 열심히 하는 전공의였기에, 교수님도 추천해주셨다.
그렇게 연세대학교 전공의를 하면서 연세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석사, 신경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나니 진로 고민이 되었다.
아직 결혼도 안했으니 이왕이면 멋진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게 낫지 않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펠로우 수련을 시작했다.
나름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당시 내가 지원한 말초신경 파트 펠로우에 지원한 사람이 3명이었는데, 내가 되었다.
지방 의대 출신에, 타병원 수련의인 나는 거기서도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더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고, 시키지 않는데 논문도 썼다.
신촌에 있는 김에 박사도 해두면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박사도 시작했다.
그렇게 인정 받아, 교원 자리의 제안을 받게 되었고, 일을 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겠다던 결심.
그 마음이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온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좋아보이는 것, 남들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커리어를 쌓아왔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니 참 치열하게, 인정받고자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목표가 내안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 아프기도 했다.
나는 왜 성공하고 싶었을까. 무시당하기 싫었다.
왜 나에게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세계관"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동생들은 그런 생각을 안하기 때문에.
타고나기를 남들의 시선에 예민했을 수도 있고, 첫째라 그럴수도 있다.
부모님이 사회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게 싫었다.
'무시당하지 못할 정도로 성공해서 다른 사람 무시하지 말고 살자.'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두번째 알아차림.
인정욕구에 절여진 나를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나의 노력은 전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것들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아니, 무시당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