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식이 끝나자마자 점심도 거르고 공항으로 향했다. 오후 세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공항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천둥 번개가 치더니 폭우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배낭이 반쯤 젖은 채로 공항에 들어섰다. 방수가 되는 등산화를 신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동화를 신었다면 삼일 내내 젖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도넛과 커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제주행 비행기 연착 안내가 전광판에 떴다. 제주공항의 기상악화때문이었다. 일부 항공사는 운항 취소를 결정한듯 했다. 도넛 하나를 추가로 더 시켰다. 운항 재개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 날씨는 거짓말처럼 개었다. 호텔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다음날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로 결정했다. 일찌감치 잠을 청했지만 새벽에는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그때마다 초조한 심정으로 제주 날씨와 한라산 입산 가능 여부를 체크했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입산 불가였다. 아무래도 한라산은 나를 허락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새벽 다섯시, 컵라면에 물을 붓고 다시 한 번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입산 가능이라는 초록색 글자가 반갑게 반짝였다. 대기 순번을 받고 애타게 기다리다가 추가로 합격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한라산 행은 시작되었다. 한라산을 오르는 코스는 두 가지인데 나는 그 중에서 조금 완만하다는 성판악을 선택했다. 산입구부터 여름비로 해사해진 나무들이 나를 반겼다.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저질 체력이지만 끈기는 있다고 자부하는 터라 열두시가 되기 전에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한라산 정상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사진을 찍어주거나 싸온 음식들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나는 정상석 앞에서 셀카를 찍고 굴러온 돌멩이처럼 조심스럽게 배낭에서 빵과 초코바를 꺼내 먹었다.
전날 내린 폭우로 백록담에는 물이 제법 많이 차올랐다. 요근래 들어 흔치 않은 일이라고들 했다. 신령한 산의 기운으로 내가 꿈꾸는 일이 잘되기를 기도했다. 그렇다. 사실 내가 한라산을 오른 이유는 몹시도 불순한 것이었다. 작가 지망생 생활만 어느덧 4년째.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지 못했고 거대한 장애물에 막힌 기분이었다. 한라산을 오르고 나면 마법처럼 정체기가 풀리고,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나는 제주에 왔다. 혹시 못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의 반대편에서 또다른 나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 영웅의 서사가 그렇지 않던가? 영웅들은 고난 속에서 성취를 이루어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이루는 성취도 더 컸다. 나는 세계의 영웅은 될 수도 없거니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내 개인 서사에서 만큼은 영웅이 되고 싶었다.
내려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돌산에 신발 앞코가 부딪혀 하산하는 내내 엄지 발가락의 통증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올라가는 길과 달리 내려오는 길에는 외로움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도 지루했고, 내 특기인 망상도 지겨웠다. 일행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지친 아이를 달래며 간식을 먹이는 엄마, 남편에게 선크림을 발라주는 아내의 모습이 내 마음에 그림처럼 남았다.
산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뒤따라 오던 청년들이 흰 사슴이 지나간다고 소리쳤다. 청년들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흰 사슴은 이미 떠난 후였다. 옛부터 한라산 흰 사슴은 길조의 상징이다. 아쉬움과 후회가 물수제비처럼 퍼져나갔다. 그들은 본 것을 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일 분 정도만 늦게 걸었다면, 버스 시간에 맞추려 서두르지만 않았다면.......마음 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한라산의 메시지 같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날의 등반으로 한라산은 내게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을 하나 주었다. 바로 무릎 통증이다. 한라산 등반의 후유증으로 나는 거의 6개월은 동네 뒷산도 못 오르는 몸이 되었다. 무릎 통증 때문에 좋아하던 맥주도 끊고 살도 뺐다. 그리고 어째서일까? 그 날 이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해졌다. 사춘기 아이들이 나와 함께 외출을 해주는 것도 고맙고, 방학이면 잊지 않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도 감사해졌다. 혼자도 좋지만 이제는 함께면 더 좋다.
나는 그날 정말 흰 사슴을 보지 못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