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는 등산

by 봄동

직장을 갖고 선을 제법 많이 봤다. 꼭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연애나 결혼에 대한 막연한 환상같은 게 있었고(그렇다. 나는 스물 아홉 살까지 모쏠이었다.) 무료한 주말, 월급의 절반을 바쳐 산 예쁜 옷을 입고 나갈데가 필요했다. 참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는 이십대였다.

첫만남의 장소는 대부분 카페였다. 주선자가 따라 나오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개는 상대의 이름과 연락처 정도만 알고 혼자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의 기대는 늘 익숙한 실망으로 바꼈다. 상대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이 이제야 드는 걸 보니 정말 철이 없긴 없었나보다. 선은 마치 증명 사진 같은 부분이 있었다. 반짝이는 한 사람의 개성을 평면화 시켜서 어지간해서는 그 사람 본연이 가진 매력을 발견해내기 어렵다.

서로의 눈에 그저 그렇게 비칠뿐인 두 남녀의 대화에는 수학 공식처럼 비슷한 틀과 패턴이 오갔다. 일상의 지루한 반복을 잘 참는 나도 나중에는 패턴이 비슷한 수십 번의 대화들에 질려버렸다. 그렇게 나는 선과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취미가 뭐냐는 질문은 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처음에는 정답을 모르는 초등학생처럼 침묵만 지켰지만 두 번째부터는 독서라는 고전적인 답안을 준비한 덕에 아냇감으로 적당한 참한 여성이라는 오해를 여러 번 주었다. 나는 의도치 않은 그런 오해들을 왜 그때그때 바로잡지 않았을까?


지금 내게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등산을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 아이들이 이 글을 읽을 일은 없길 바란다. 그 아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등산이 취미라고? 엄마 취미는 소파에 누워 유튜브 보기 잖아? 아, 맞다. 다른 것도 있다. 맥주 마시기. 하지만 얘들아, 취미는 정답처럼 한 두가지이거나 꼭 자주 하는 일이 아니어도 된단다. 1년에 한 번을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잊지 않고 꾸준히 하는 일이면 그게 바로 취미지.

내가 등산을 만나게 된 것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나는 몇 건의 일들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고, 바람빠져 흐느적대는 풍선 인형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그 날은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소파에 누워 휴대 전화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짧은 글과 함께 올라온 몇 장의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다. 녹음이 우거진 등산로 사진과 산 정상의 표지석, 등산로 초입에 있는 간판없는 국수집 사진이다. 국수집에는 막걸리와 파전도 판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그해 여름, 산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초보자가 다닐만한 등산로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고, 무엇보다 혼자 등산을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그런데 마침 사진 속 산은 우리 지역에 있는 산이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함께 산에 가고 싶다고 글 작성자에게 쪽지를 보냈다. 여교사들만 있는 커뮤니티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가 안심할 수 있게 현재 내 상황이며 나이 등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첨부했다.

다음날 답장이 왔고 주고 받은 연락처로 첫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만난 것이 Y였다. 그녀도 나처럼 휴직중이었다. 등산 경험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니 Y는 자기 아파트 뒤 숲속 산책로를 첫 등반(?) 장소로 선택했다. Y의 등산 코스 중 가장 쉽고 만만한 곳이었다. 우리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초순에 처음 만났다. 뜨겁게 내려쬐는 햇살 속에서 만난 그녀는 어디가서 손해 안 볼 것 같은 얼굴과는 달리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센스가 있었다.

Y가 고른 코스는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산 둘레를 산책하는 길이었다. 경사는 완만했지만 내 체력은 마음과 달랐다. 오르는 내내 몇 번이나 쉬었다. 목적지까지 겨우 도착해 그녀가 싸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눠마셨다. 목적지는 산 중턱에 있는 개울이었다. 개울물에 땀도 씻고 뜨거워진 발도 담궜다.

여름의 옷을 채 벗지 못한 초가을에서 산이 죄다 잿빛으로 변하는 겨울의 초입까지 Y와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만났다. 우리는 산 초입에 있는 국숫집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앞에 두고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고, 다른 지역에 있는 산에 원정을 가기도 했다. 찬바람이 불어올 무렵에는 숲속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르내릴 정도가 되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나서는 함께 쇼핑을 가거나 평일 저녁에 만나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나름의 재미는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Y와의 시간은 산에서가 가장 즐거웠다. 둘 다 다음해에 복직을 했고 간간이 이어지던 연락은 몇 해가 지나 완전히 끊어졌다. 좋은 인연을 잘 챙기지 못한 나의 탓이다.


예전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한번씩 Y와 처음 올랐던 숲속길을 걷는다. 힘든 일이 내 마음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을 때이다. 첫 만남에서 그녀가 그랬듯 보냉병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챙긴다. 동행이 없으니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와 새 소리만 내 공간을 가득 채운다. 2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우리 아이들이 초코파이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나온다. 초코파이 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잠깐 앉아 땀을 식히고 물을 마신다.

여기까지만 하는 마음이 들 때쯤 일어나서 또 걷기 시작한다. 초코파이 바위에서 20여분을 더 걸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나온다. 낭떠러지 끝에 있는 판판한 바위인데 한 사람이 앉기에 딱 적당하다. 낭떠러지라니 위험천만하게 들리지만 완만한 낭떠러지다. 이 산에 있는 것은 경사도 낭떠러지도 모두 다 완만하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도 둥글어져서 돌아온다.

바위에 앉으면 저멀리 연하늘색 인공 호수가 보인다. 호수를 바라보면서 챙겨온 아이스 커피를 마신다. 그러다 보면 시야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맞춰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꼭 내게건네는 위로 같다.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울기도 여러 번 했다. 바람과 나뭇잎이 있는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Y와 발을 씻었던 개울까지 더 가기도 하고, 거기서 돌아오기도 한다.

Y와 함께 하산할 때는 종종 다람쥐나 산새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번은 산새가 Y의 배낭에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산에 갔지만 혼자서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 해 가을이 마치 동화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두 계절을 산에서 보낸 덕분에 나는 여름보다 좀 더 튼튼해지고, 단단해졌다. 하지만 일년에 한 두 번은 산에 가서 울 일이 생긴다. 연하늘빛 호수가 보이는 바위에 앉아 눈물을 비우고 아이스 커피로 달아오른 마음을 식히고 나면 좀 더 가벼워져서 내려간다. 어떨 때는 내가 산에 너무 많은 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산도 내가 그리 싫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바람결에 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한번씩 들리니 말이다. 그런 주말에는 꼭 산에 간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산도 나와의 만남을 즐기고, 나도 산과의 만남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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