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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빈 May 03. 2024

멘토 선생님

재능을 담을 그릇

2008년에 홍대 앞에서 고시원생활을 하며 미술학원을 다니고 있었을 때였. 당시 나는 22살이었 대학을 휴학하고 학원을 더 다니던 중이었다.

"원장님, 저 학원에 남아서 그려도 돼요?"

겨우 허락을 받아서 학원 수업시간이 아닌 때에도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 고시원에는 씻을 때만 가고 거의 학원에서 잠을 자고 학원을 밥을 먹고 학원에서 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학원에서 홀로 싸우는 시간은 외롭기도 했다. 그리다 졸리면 잠깐 학원바닥에 누워서 앞치마를 덮고 10분 잠깐 자고 일어나서 또 그리곤 했다. 울다가 그리다가 지쳐가고 있었다. 매일 10~14시간을 그리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에게 지쳐갔다. 그 시간들은 나를 점차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계속 그래왔듯이 그날도 아무도 없는 학원에서 혼자 새벽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나한테 화가 나서 연필을 집어던졌다. 이 정도밖에 못 그리는 내 손이 답답했다.

'내 손은 왜 이렇게 밖에 안 될까?'

'이 바보 같은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다.'

이런 생각들로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내가 고등학생일 때 날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생각나서 나는 전화를 걸었. 늦은 시간이라 민폐인데 선생님은 태연하게 전화를 받으셨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그림이 잘 안 되냐."

"새벽에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고1이던 때에 선생님을 처음에 만났을 때 저는 어떤 아이였어요? 제가 재능이란 게 있긴 할까요? 저 진짜 재능 하나도 없는데 그냥 꾸역꾸역 혼자 오기로 이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 내가 예전에 한 말 잊었나 보네. 내가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재능 있는 아이들은 정말 많. 그 재능이 뛰어나든 애매하든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많. 그런데, 그 재능을 담을 그릇을 가진 아이들은 많지 않아. 그래서 끝까지 가질 못해. 내가 말했지 않았냐, 재능보다 그걸 담을 그릇이 더 중요하다고. 너 사전에서 '재능'이란 단어를 찾아봐. 재능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타고난 능력과 훈련으로 만들어진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고 나온다. 사람들은 타고난 능력만 생각하는데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능력도 재능이다. 그릇이 되면 재능은 만들어서 그 그릇에 집어넣으면 된다. 너 고등학교 때 나는 너를 보면서 뭐 이렇게 지독하게 열정 넘치는 애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 아주 열정이 지독한 애라서 얘는 계속하겠구나 싶었다. 잡생각 말고 그림이나 그려."

"손이 너무 바보 같아서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인걸요."

"그런 멍청한 생각할 시간에 그림 한 장이라도 더 그려!"

"네...."

멍청한 생각 한다고 혼나서 그림이나 더 그렸다.


"타고나야 하는 건 재능이 아니라 노력을 타고나야 해."
- 유도 선수 김재범


대학을 졸업하고 프리랜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생활은 힘들었다. 2017년에그림을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이 길을 가는 건 쉽지 않다. 고정적인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생활비를 위해 다른 알바를 병행하면서 해온 시간들이 힘들었다. 힘든 시간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니까 번아웃이 왔다. 문득 선생님이 생각나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저 진짜 그림 그만둘까 봐요.."

"살다 보면 진짜 크게 아플 수도 있고 가족을 잃기도 하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힘든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건 다 어쩔 수 없어. 다른 건 다 힘들어된다. 다른 건 다 힘들어해도 그림한테는 지지 마라. 내 제자는 그림한테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다른 건 힘들어해도 되는데 그림한테 지지 마라. 내 제자는 그림한테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고 2020년 어느 날,

나의 첫 책이 출간될 때 선생님께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려드렸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고맙다. 나는 그만둔 길을 너는 계속 가줘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그만뒀을 수도 있는데 계속 잡아주셨잖아요. 선생님이 이런저런 해주셨던 말씀들을 수강생분들에게 말하면 다 명언제조기라고 해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 이미 포기했을걸요."

"나는 어느 학생에게나 다 똑같이 말한 건데 보통은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도 못해. 내가 한 말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똑같이 해줘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듣고 다른 역할을 해내지. 그 말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행동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한 거야. 계속 그려줘서 고맙다."


흔들릴 때마다 잡아준 내 인생의 멘토 이곤호 선생님. 

나는 나의 첫 책에 선생님의 이름을 넣어드렸다.

잘 그릴 수 있을 거야 색연필화 (김예빈 저/E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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