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과거 시험을 보려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공부해야 했다. 사서오경은 유교에서 경전으로 삼는 책이며 그중에 사서에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있어. 요즘으로 치면 국, 영, 수에 해당하지. 중용(中庸)은 원래 예기(禮記)에 속했으나 송나라 때 대학자 주희가 그 내용이 너무 중요하고 유교의 핵심이라 생각해 독자적인 책으로 재편성하였다고 해. 오늘은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중용의 지혜를 배워 보려 한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지었으며 그 뜻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말한다. 중(中)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며, 용(庸)은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BALANCE’라 할 수 있지. 사전적인 뜻은 간단하나 그 안에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어. 중용은 한의학의 기본 원리처럼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채우는 균형 잡힌 인생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야. 중용은 중간이 아니다. (시험 점수를 50점 받아와서 중용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중용은 극단을 피한 최선의 지혜를 말한다.
요즘 직장인들은 워라벨(Work & Life Balance)을 가장 중요시하지. 일과 인생의 균형을 맞추는 생활의 중용이라 할 수 있어. 중용은 균형이야. 연습을 통해 균형 잡힌 인생을 살 수 있지. 인간관계, 의사결정, 감정 관리에도 중용의 지혜가 필요하다. 때에 맞춰서 변화하는 것이 중용의 핵심이야. 중용의 반대의 개념은 반중용(反中庸)이다. 극단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반중용적 삶이야. 중독은 반중용이라 할 수 있지. 게임에 중독되는 것처럼 오로지 한 가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도 반중용적인 삶이다.
중용 첫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노자의 도덕경과 마찬가지로 중용 첫 장이 전체 내용을 요약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이 구절을 풀이해 보겠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인간의 본성은 하늘이 끊임없이 명령하는 것이다. 하늘이 인간에게 명하여 하늘다움을 주었으니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인간은 천성을 잘 따르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 나가가야 할 중용의 도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하늘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천성을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인간이 가야 할 도이다. 가장 하늘처럼 사는 것이 중용의 도인 것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그 길을 끊임없이 닦아 나가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수도란 천성을 잘 구현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며 닦아 나가는 과정이다.
영화 <역린>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조는 신하들과 경연에 대해 논쟁하던 중에 중용 23장에 대해 묻는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 23장에는 ‘정성’이 강조된다. 지극한 성실함 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동력이라는 것이야. 그리고 그 동력의 시작은 나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
중용에는 중화(中和)라는 개념이 있어. 중(中)은 균형을 뜻하고 화(和)는 감정의 적절한 표현을 말해. 중용에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너의 모든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라.” 그것이 감정의 중용이야. 인간의 감정은 끊임없이 중용을 이루는 것이지. 분노는 중용이 깨진 것이야. 화가 났을 때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바로 표출하는 것은 반중용적인 삶이지.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중용의 첫걸음이다.
지구의 존재도 우주적 중용의 결과다. 태양 같은 항성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아서 생명체가 살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골디락스 존 goldilocks zone’이라고 해. 지구는 운 좋게도 이 골디락스 존에 위치하고 있어. 지구도 태양과 중용을 유지하기 때문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
자사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을 말했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이성적인 삶이란 ‘중용을 사는 것’이야. 중용의 습관이 곧 ‘덕 Arete’이요, 행복이라고 말했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중용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야. 그 상황의 적절함을 사유하는 능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이성’이라 정의했어. 예를 들면 비겁함과 무모한 사이의 ‘용기’라 말할 수 있지.
비겁함과 무모함은 두려운 마음에서 기인된다. 분노의 심리적인 근원은 두려움이야.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용기이고 이 용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용인 것이지. 비겁과 무모 그 중간의 용기가 진정한 덕이다. 중용을 행하면 덕을 쌓을 수 있고 그 덕을 쌓는 것이 공동체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어. 두려움을 극복하고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사회적 행복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
분노를 분출하면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느껴진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타인으로부터 주목받는다는 장점이 있지. 그래서 자신이 평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주목받으려고 분노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어. 분노는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외침이야.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분노한다. <주체성> 편에서도 얘기했지만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살아가게 되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생존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큰 분노를 일으킨다. 내 안의 분노를 느낀다면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어. 분노하면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약할 때야. 분노의 태풍이 일어날 때 그 근원지를 찾아갈 수 있다면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나의 나약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나약함의 외투마저 걷어 보면 외로움에 떨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한 상처받은 어린 자아가 있다고 해. 이를 ‘내면아이’라고 하지. 무의식에는 삶의 모든 정보가 나도 모르게 저장된다. 그중에서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감정은 무의식 아래에 숨어서 계속 나의 삶에 영향을 준다. 치유되지 못한 과거의 상처는 나의 성격, 성향, 행동, 자존감, 인간관계 일 등 삶에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치지. 나의 내면 아이를 이해해야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 결핍이 무의식적으로 나의 행동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야. 상처받지 않은 인간은 없어. 인간은 자신의 상처와 결핍을 치유하며 성장한다. 치유 못한 상처가 많을수록 불안하고 두렵다. 그리고 지나치게 과잉 대응하며 살기도 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나친 방어 모드로 지내다 보니 쉽게 분노한다.
분노가 상처를 포장한다. 상처가 결핍을 낳고, 결핍은 고통을 낳고, 고통을 분노를 낳는다. 상처를 받을수록 타인에게도 상처를 주게 되지. 상처로 인한 깊은 결핍은 왜곡된 욕구를 만들기도 해. 결핍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과소비와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분노한 사람은 고슴도치와 같아. 가시를 세워 나약하고 상처받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지. 인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 Osho Rajneesh 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부모는 당신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또 다른 탄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그러한 탄생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 나의 내면 아이를 진정 사랑할 수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이유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조용히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다. 분노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명상을 추천한다. 눈을 감고 내 안의 분노를 찾아가는 거야. 분노를 만난다면 왜 화가 났는지 물어보자. 하지만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분노는 실체가 없는 순간의 느낌이기 때문이야. 실체도 없는 느낌에 속아 감정을 낭비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분노의 실체를 찾아 계속 나의 심연으로 들어가다 보면 웅크려 울고 있는 내 어린아이를 발견할 것이다. 그 아이를 만나면 그냥 따뜻이 안아주자. “그동안 혼자 많이 힘들었지. 분노는 네가 나를 부르는 외침이었구나. 네 탓이 아니야. 넌 나의 사랑을 기다렸지만 나 그걸 몰랐어. 이제 알게 되어 미안해. 네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타인의 인정과 물질의 보상만을 받으려고만 했지. 이제는 너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할게.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분노 안에 가두지 않을 거야. 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야. 힘든 시간 속에서 지금까지 잘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이누이트인들은 분노가 밀려올 때면 무작정 걷는다고 해. 분노가 풀릴 때까지 걷다가, 화가 풀려 마음의 평안해지면 그때 되돌아오는 거지. 그리고 돌아서는 바로 그 지점에 막대기를 꽂아 둔다고 해. 나중에 또 화가 나면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전에 꽂아둔 막대기가 보이지 않으면 ‘이 번 일은 별거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무조건 걸으라고 했는데 화를 달래는 지혜는 동서고금을 넘어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타인의 생각을 수용하는 방법으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있어. 타인은 나의 거울이야. 타인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고 확장하게 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지.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타인의 덕분이므로 감사해야 해. 가족치료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 심리학자 버지니아 사티어 Virginia Satir는 이런 말을 남겼어. “우리는 서로 비슷해서 연결되어 있고, 서로 달라서 성장한다.”
오늘은 분노의 개인적인 측면을 이야기하였고 다음 기회가 된다면 분노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 다루어 볼게. 분노의 양날의 검이야. 분노는 주변의 공격으로부터 날 지켜주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나를 찌를 수도 있어. 분노는 내가 지금 두렵다는 신호이고, 내 안의 외로운 어린아이의 외침임을 알아야 한다.
아빠는 아빠의 내면 아이를 늦게 발견했다. 아빠의 불안과 고통의 원인이 나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지. 그래서 너를 키울 때 최대한 너의 내면 아이가 자라지 않도록 하려 했는데, 지금 네 안에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있다면 미안하게 생각한다. 화가 나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나의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보자. 걸음이 멈춰지면 자리에 막대기를 세우고 메모를 남겨보자. ‘다음에는 여기까지 오지 않을게.’ 그렇게 다시 돌아오다 보면 이전보다 성숙한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면서 정성을 들였듯이, 우리의 지극한 정성이 쌓이면 분노하는 사회에서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태풍 같은 세상 속에서 고요하고 지혜로운 꽃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