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치매를 의심하다
'내가 치매걸린건가?'
서른밖에 되지 않은 나는 스스로 진지하게 그 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매일 감정, 생각없이 에너지를 지붕에 전부 쏟고 화장실 앞에 누워서 책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날 읽었던 문장들은 다음 날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 줄, 한 단어조차 다음날이 되면 신기하게 누군가 머리속에서 락스를 뿌린 처럼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게 내 머리속의 하루 루틴이었다.
책을 지붕 현장에 들고 가면 이해가 될까?
화장실 앞에서 뿌옇게 그림체처럼 보이던 글자가 지붕 근처에서는 이해가 될까?
그런 의심을 가지고 나는 매일 새벽 6시, 도시락 가방에 전날 싸둔 도시락과 함께 책을 넣었다.
어떤 기대보다도 책을 챙기지 않으면 그런 의심이 불안으로 증폭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붕 현장에 도착하면 책이 든 가방은 차에 둔 채 아무 생각 없이 사다리를 올랐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려 가방을 열었을 때, 도시락 옆에 책이 있었다.
‘아.. 책도 있었지..’
책을 챙겼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정말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싶었다.
가끔은 이런 상상도 했다.
'만약 내가 호주에서 치매에 걸린다면?'
나는 매일 이유도 모른 채 염전노예처럼 지붕 위에 올라가 못질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아무 감정도 없이 그냥 버릇처럼 유튜브를 보면서 밥을 입에 퍼 넣었다.
어차피 읽지 않을 거면 그냥 책 한 페이지를 찢어서 밥 숟가락 대신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런 날들이 반복되자 책은 점점 책이 아닌 그럴싸한 장식이 됐다.
책은 그냥 옆에 끼고 다니는 악세서리처럼.
하지만 책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졌고, 내 도시락 가방도 그 무게만큼 더 무거워졌다.
어느날, 지붕 위에서 호주인 사장 스티브가 갑자기 가르쳐준 적 없는 걸 시켰다.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가르쳐줄 수 있어?”고 하자,
“어깨 너머로 안 배웠냐? 아무 생각이 없네.”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짜증을 내는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자기 감정을 종이구겨 던지듯 그대로 나한테 던져댔다.
평소처럼 나는 감정 쓰레기통처럼 아무 감정없이 그걸 전부 받아줬다.
스티브는 애처럼 감정을 쏟아내고 나는 감정을 잃은 부모처럼 오냐오냐 받아줬다.
누가 말하길, 치매는 감정이 없어져서 생긴 병이라고 했나.
그렇게 점심시간 직전, 나는 지붕에서 짜증을 한 솥을 먼저 먹었다.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
나는 말없이 지붕에서 쫓기듯 내려왔다.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도시락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그 안에 책이 있었다.
이번엔 도시락보다 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예전처럼, 책이 지금의 나를 바꿔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벼운 도시락통을 열기전, 매일 나르는 몇십키로 나무보다 더 무거운 책의 앞 표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 첫 줄을 읽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냥 지금 내 현실 같았다.
어디서 본 멋진 명언처럼 들리지도 않았고 철학적인 해석도 필요 없었다.
언제 느꼈던 감정이었을까.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조금식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지붕 위에서 망치질로 못을 박듯, 책질로 그 문장을 내 안에 박기로 했다.
내 현실은 단순했다.
살든가, 죽든가.
버티든가, 무너지든가.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나는 무너질 뻔한 순간마다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왔다.
"감정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감정을 살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