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최초의 열전』
이 책의 부제목은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역사관 논쟁이 불거졌다. 논쟁은 “6·25가 북한의 기습침공이 아니라 38선 경계 지점에서 잦은 마찰로 발생한 전면전”이라는 야당 대표의 발언으로 촉발되었다. 한국전쟁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독일의 현대 역사학자 슈퇴버가 쓴 책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분단국이 되었다가 1990년 평화통일을 이루었다. 지은이는 냉전체제와 분단국에 관해 집중 연구해오고 있다. 외국인의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은 어떤 것인가?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명확하게 입증된 자료에 의해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1991년 냉전이 끝난 뒤 보관기록들이 공개되자 과연 누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라고 한다.
소련 당서기장 흐루소프의 회상록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 3월 모스크바의 스탈린을 찾아가 통일을 위한 군사적 해결 가능성은 논의했다. 김일성은 남한에서 정부 수립 후 미군 철수가 또 다른 커다란 기회를 제공하리라고 확언했다. 미군 철수가 38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련 당서기장 흐루소프의 기억에 따르면 김일성은 “옆구리를 한번 찌르기만 해도 남한에서 정치적인 폭발이 일어나 인민이 권력을 쟁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입증된 바에 따르면 소련 스탈린은 1950년 1월에 마오쩌둥을 만나 직후인 2월 9일 한국의 통일에 필요한 ‘해방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김일성의 원하는 조치들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스탈린이 일반적으로 동의했음에도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 역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내전이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1년 이상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지속된 협상과 심사숙고 결과 결국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직후 탱크, 대포, 전투기의 지원을 받은 약 12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한다.’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말에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미국 대통령 투르먼은 즉시 유엔안보리에 안건을 올렸다. 1950년 6월 27일 군사적 개입을 허용하는 유엔 결의안 83호가 채택되었다. 미군이 유엔군이 주력부대였지만 20개 국가가 1951년 6월 30일, 1952년 6월 30일, 1953년 6월 30일 군인을 파견했다.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영국, 캐나다, 콜롬비아, 룩셈부르크, 뉴질랜드, 네덜란드,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터키가 전투병을 파견했고,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병을 보냈다. 이 전쟁의 휴전협정은 1951년 10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765회의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이 개략적인 한국전쟁에 관한 이 책의 기록이다.
이 책은 7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일제 식민지 조선, 1910~1945년’, ‘한반도의 분단, 1945~1950년’, ‘한국전쟁의 시작, 1950년 6월~10월’, ‘전쟁이 전환점과 휴전, 1950년 10월~1953년 7월’, ‘한국전쟁이 전 세계에 미친 결과’, ‘1953년부터 두 나라로 갈라진 한반도’, ‘냉전 이후 한반도의 갈등’.
1930년대 말 한국에서는 거의 1,000여 개에 이르는 정기간행물이 시장에 유통되었다. 수십 년간 식민 지배가 끝난 1945년 한국인의 약 80%가 문맹이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공식적으로 일본이 항복한 날인 1945년 9월 2일 끝났다. 이미 2주 전 8월인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항복선언을 하였다. 1945년 9월 9일 서울의 총독부 옥상에서 일장기를 내림과 함께 35년에 걸친 한국의 식민지 역사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해방 이후 1945년에서 1951년 사이에 미국은 약 10억 달러를 남한에 투자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북한군은 남한군의 거의 두 배인 20만 명 수준이었다. 소련은 T34/85를 중심으로 379대의 중전차뿐만 아니라 약 200문의 대구경 대포와 수백 대의 전투기를 제공했다. 남한은 약 10만 명의 육군과 공군, 6,000명 규모의 해안경비대를 보유하는 정도다. 중화기뿐만 아니라 현대식 비행기도 보유가 금지되었다. 대포의 경우 90문의 105밀리미터 박격포와 대전차무기가 전부였다. 남한 공군은 일본인 남기고 간 훈련기 등 구식 비행기 46대에 불과했다. 해군은 1척의 구축함, 15척의 소해정이었다.
중국은 북한에 1950년 10월 19일과 11월 5일 사이에 중국 인민지원군 6개 군단을 지원하는 등 한국전쟁 기간 중 보병부대만 74만 명을 투입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벌써 ‘좌와 우’ 남북한 정부 추종자들 사이의 내전이 피를 뿌리며 최고조에 달하였다. 북한의 조종을 받는 남로당 추종자들이 1948년 4월 2일부터 서울에서도 남한 정부와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1948년 초에 일어난 좌익 활동가들의 시위는 결국 제주도를 해방구로 선언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남한은 1953년 10월 1일 나토조약기구의 규정에 의거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남한을공격하는 행위는 미국을 공격하는 것고 동일한 것을 간주되었다. 부시 대통령 재임 시에 정치적,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해 남한은 미국의 비나토 주요 동맹국가MNNA(Major Non-NATO Ally)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한반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는 폭 4km, 길이 248km이다. 한국전쟁의 특이한 결과는 사망자가 수백만에 달하는 양측 모두 사실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통일은 거의 이루어지기 힘들 정도로 요원해졌다.
평등한 사회라는 북한이 얼마나 철저한 계급사회인지는 1950년대부터 전체 주민을 그들의 충성맹세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핵심 계층은 당원들이다. 남한, 서구 그리고 특히 미국에 대해 자칭 또는 실제 호의를 갖는 사람들은 확신할 수 없느 사람들인 동요 계층과 적인 적대 계층에 속하게 된다.
1960년대에는 심지어 51개 분류 계층 제도가 도입되었다. 첫 번째 그룹은 12계층, 두 번째 그룹은 9계층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은 30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분류가 북한 인민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신뢰할 수 없는 계층으로 분류된 가족 출신의 북한 사람에게는 오늘까지 모든 진급 기회가 근본적으로 막혀 있다. 더욱이 수용소는 명예 회복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예전에 한 번 수감 되었던 수감자는 영원히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군대만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다. 국제사면위원회는 2,200만 북한 사람 전체의 약 4분의 1에 대항하는 500만 가량의 사람들이 적대계층에 속한다고 제시한다.
남한 정부의 보도에 따르면 고랑포 북동쪽 8km 지점의 제1땅굴, 철원 북쪽 13km 지점의 제2 땅굴, 판문점 남쪽 4km 지점의 제3땅굴과 같은 거대한 남침용 땅굴은한 시간에 북한군 3만 명을 남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 제4땅굴은 1990년 3월 양구에서 북동쪽으로 26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디었다. 추측건대 적어도 12개의 땅굴은 더 설치되었을 것이다.
2006년에야 ‘햇볕정책’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의도대로 실현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0월 9일에 강행된 북한의 제1차 핵실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검찰 수사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짧은 유서를 남기고 삶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이 주변인들의 뇌물수수에 따른 여파였는지는 해명되지 않았다. 김정일 치하의 북한은 그의 아버지 김일성 정권 때와 똑같이 적대적이었다. 남한 국민들도 이런 사실을 역력히 보고 있었다.
독일 역사학자가 본 한국전쟁과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이 책에서 보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심리에 대한 표현이 있다. 전쟁터에서 정신질환이 많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투에서 망설임 없이 정신적 충격이 클 것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많은 외국 군인에 대한민국은 영원한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마오쩌둥의 잘못된 계산이 만들어낸 한국전쟁을 읽으면서 정치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으로 가서 그의 출생을 막고 싶다.
책 소개
『한국전쟁』 베른트 슈퇴버 지음. 황은미 옮김. 2016.06.20. 여문책. 322쪽. 17,000원.
베른트 슈퇴버 Bernd Stover. 1961년생. 괴팅겐 대학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역사학과 독일교육학을 전공했다. 1991년 빌레펠트 대학에서 역사학을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츠담대학 역사학과 교수. 지은 책. 『냉전이란 무엇인가-극단의 시대 1945-1991』 등.
황은미. 독일 보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과 한국학을 전공, 독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연구원, 한양대 겸임교수, 서울대, 한국외대, 한국예술대학교, 경기대, 원광대 등에서 독일어와 커뮤티케에션 기법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 『우울증을 이겨낸 사람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