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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의 성지, 오수

by 물구나무 Nov 27. 2023

   

12시 34분 열차가 들어온다. 용산까지 상행하는 1536호 무궁화호는 겨우 객차 두 량을 달았다. 기차는 오수역에 잠시 정차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내리는 승객도 없다. 플랫폼에는 나이 지긋한 역무원 두 사람뿐이다. 철로를 가로지르는 횡단지점에 서서 가벼운 한담을 나누던 그들은 기차가 떠나길 기다렸다. 기차의 뒷모습이 차츰 멀어지면서 평행선으로 이어진 소실점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간다. 건널목의 차단기가 오르고 직원들이 사무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사무실 문이 잠겨 있었던 걸 보니 두 명이 전부인 듯하다. 텅 빈 대합실에서는 할 일 없는 승차권 자동발매기가 덩그러니 놓였고, TV 혼자 뉴스를 떠들어 대고 있다. 익산과 용산으로 가는 상행선과 여수엑스포로 하행하는 무궁화호는 하루에 각각 열한 번씩 오수역에 정차한다.     

 

한때는 섬진강 물길을 끼고 장수 산서와 순창 동계, 그리고 남원, 임실을 잇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 이유로 일찌감치 전라선 기차역이 들어섰고, 몇 해 전에는 역참 터 자리에 역참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번성했던 역사를 회상하고 번영의 길로 재도약하자는 취지겠지만, 이미 뒤안길로 접어든 오수의 내일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호나 통일호마저 사라진 세상에서 전라선 철길을 따라 완행하는 무궁화호 열차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점점 더 빠르게 달려가는 세상에서 느린 것들은 도태되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이 서글픈 운명인가 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한낮의 오수역을 벗어나자 아직 모를 내지 않은 빈 들판 너머 면 소재지의 풍경은 한 줌이다. 간혹 트럭이 지나는 한산한 2차로를 따라 이팝나무꽃이 한창이다. 절기상 입하에 맞춰 피는 꽃은 고봉에 담긴 하얀 쌀밥을 닮은 꽃을 가지마다 잔뜩 달았다. 올해도 풍년이 들 모양이다. 쌀이 남아돈다는 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석구석 이어진 이팝나무 때문에 오수의 오월은 때아닌 별천지다. 하지만 5일과 10일 열리는 장날이 아니면 거리에는 사람이 드물다. 65세 이상 노인이 열 명에 네 명꼴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오수는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그나마 호박이나 고추 모종을 찾는 발길이 드문드문하고, 점심시간에 맞춰 몇몇 식당을 찾는 젊은 인부들이 눈에 띈다. 더러 공원 가장자리 나무 그늘진 자리를 따라 빈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들이나 만나야 이런저런 말이라도 섞을 수 있다.                


1년에 한 차례, ‘의견문화제’가 다가오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오수는 잠시 활기가 넘친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춰 해마다 열리는 행사는 올해로 38회째다. 코로나19 때문에 몇 년 주춤했던 탓이었던지, 풀도 깎고 쓰레기도 말끔히 치웠다고 보도자료까지 내며 임실군은 사전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개통령’으로 불리는 강형욱 훈련사가 섭외되고 현역 교수와 수의사가 토크콘서트를 벌인다. 이름난 연예인이 진행을 맡고 지역 방송국이 협찬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몇 해 전 새로 시작한 패션쇼는 볼만한 눈요깃거리다. 아마추어 견주도 있지만 관련 전공 학과 학생들이 미용도 시키고 멋을 부리며 가진 기량을 한껏 자랑할 수 있어서인지 지난해보다 신청자가 늘었다고 한다. 3백만 원 상금도 걸렸다. 지역 주민들도 기웃거릴 만큼 눈길을 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긍게이 참말로 뭔 극성인지 몰르겄네. 지 부모헌티나 저렇게 좀 혀 보지. 개 팔자가 상팔자네이”


구부정한 허리로 반려견 패션쇼를 지켜보던 할머니 한 분이 불쑥 던진 말 폭탄 한 방에 웃음이 터졌다. 흥을 돋우는데 노래자랑만 한 것도 없다. 크고 작은 상품들이 잔뜩 걸리고, 동네방네 ‘좀 놀 줄 아는’ 선수들이 이미 사전등록까지 마쳤다. 사람보다 개들이 신나는 프로그램은 ‘의견대회’다. 마치 육상 대회나 운동회에 나온 아이들처럼 달린다. 가족의 응원이 주는 힘은 개나 사람이 다르지 않은가 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반려견 인구 천만 시대, 임실군과 오수면은 이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다. 면에 하나뿐인 고등학교는 학생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반려동물산업과’를 신설했다. 반려동물 미용사, 관리사, 행동 교정사, 장례지도사까지 다양한 자격증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친다고 한다. 학교 이름도 아예 ‘전북펫고등학교’로 개명을 추진하고 있다. 몇 해 전에는 반려동물 전용 장례식장인 ‘펫 추모 공원’도 개장했다. 지자체가 직영하는 첫 사례라고 한다. 대체로 혐오시설이어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한데, 오수가 ‘의견의 고장’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한편에서는 애완견과 함께 의견비를 몇 바퀴 돌면 무병장수한다는 식의 스토리텔링도 구상 중이라는 말도 떠돈다. 술에 취해 풀밭에 쓰러져 잠든 주인을 구했던 오수 개의 전설이 지역소멸의 위기 앞에 놓인 오수도 살려낼 수 있을까.      


아직 밝은 전망을 내기에는 일러 보인다. 더구나 임실과 오수의 이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올해 대회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대회 기간 내내 이른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애써 준비했던 프로그램들이 속속 축소되거나 취소되고 말았다. 우비에 장화까지 갖춰 신은 진행자들이 고군분투했지만, 3일 내내 내리는 비 앞에서 참가자들이나 행사 관계자들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안타까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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