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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구나무 Jun 14. 2022

바람과 안개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섬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 닥치는 바람 때문에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무심코 내어놓은 쓰레기통이나 살림살이가 나뒹구는 실수는 다반사고 햇빛 가림막은 묶어도 묶어도 쉴 새 없이 들썩거려서 밤잠을 설치게 만든다. 태풍 예보라도 뜨는 날이면, 작은 섬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선착장에 묶어둔 배는 말할 것도 없고, 지붕부터 창문과 문짝 단속까지 바람 샐 틈 없이 살펴야만 한다.      


섬사람들은 바람이 터졌다고 말한다. 그런 날은 갈매기들도 멀리 날지 않는다. 포구 가장자리를 따라 해안 절벽에 부딪쳐 솟구쳐 오르는 바람을 타고 그저 활공했다. 목적 없는 그들의 비행은 가벼웠다. 힘들이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물렀다. 섬과 새가 아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숨죽인 시간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꿈틀거리는 바다는 섬을 길들여 왔다. 혹시라도 사리 때 하고 맞물리기라도 하면 방파제를 우습게 넘는 파도에 봉변을 당하는 게 섬살이다. 당연지사 그물을 살피러 나갈 수 없다. 마실 나갈 엄두도 쉽지 않고 방안에 그저 처박혀 지낼 도리밖에 없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난 자리는 역력하다. 줄이 풀려 뒤엉킨 김발도 손봐야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진 부표도 다시 묶어야 한다. 부서지고 헐거워진 살림을 다시 고치고 조여야 한다. 늘 해야 할 일을 만드는 바람 덕에 섬살이는 심심할 틈도 게으름 부릴 여유도 주지 않는다. 바람은 이겨낼 수 없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진을 빼놓는다.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건 안개도 마찬가지다. 일교차가 큰 계절이면 시시때때로 안개는 몰려온다. 자고 일어나면 밤사이 진군해온 안개에 포위된 하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김없이 여객선이 끊긴다. 약간의 바람과 파도에 운항하던 배도 안개 앞에서는 무력하다. 더러는 예보조차 없이 덮쳐 들기도 한다. 가까운 바다로 배를 몰고 나갔다가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몰려드는 안개구름에 갇히기도 한다.               


한 번은 사선을 얻어 타고 명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소개받은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안개를 만났다. 먼발치에서 몰려오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봤지만 나를 태운 작은 배는 안개의 추적을 따돌리지 못했다. 내비게이션으로 짐작해볼 때 장자도와 명도 중간 즈음 암초와 등대가 있는 근처였다. 그 항로는 수시로 고깃배와 유람선도 지나는 곳이다. 육지로 치면 번잡한 도심 사거리 한복판에 놓인 꼴이었다. 암초 위에 세워진 등대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바로 뒤에서 키를 잡은 선장 모습도 흐릿했다. 시동을 끄고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자니 조류를 탄 배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다. 선장은 뱃전 앞을 살피는 나의 시력과 목소리에 기대어 길을 더듬어갔다. 레이더가 없는 작은 배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 큰 배를 피할 도리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랜턴을 흔들고 소리도 질러보지만 금방 묻히고 말았다. 바다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기를 삼십여 분, 마침내 안개구름을 벗어났다. 천행이었다. 뱃전 앞으로 몰려가는 구름 뒤편은 전혀 딴 세상 같았다. 장자도 포구에 배를 대고 뭍에 발을 디디자 주저앉듯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 있던 다리 힘부터 풀렸다. 그날 저녁 술자리는 자연스럽게 안개가 안주로 올라왔다. 해무가 짙게 낀 날, 갯벌이나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너나없이 포구로 몰려나가 봉홧불 피우듯 횃불을 들고, 징을 울리고, 고함을 질러 돌아올 길을 더듬도록 했다고 한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못한 이웃들도 적지 않았다. 어릴 적 친구 아버지, 가까운 친척 어르신, 그리고 일찍 돌아가신 형님 …….     

 

평소에는 입에 올리지 않고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이름과 기억들이었다. 한 번씩 그런 변고를 당하고 나면 마을 전체가 침울해지곤 했다고 한다. 나이를 따져 순번을 정하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라도 내 차례가 될 수 있었다. 두려움 때문에 섬을 떠날 생각을 수백 번도 더 해보았지만, 아직껏 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숙명이라고만 여기기엔 너무 많은 아픔을 품고 있었다. 섬마을 사람들은. 그리고 해마다 이 계절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해무는 그 상처를 해집어 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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