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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러니, 다시 떠나야 합니다.

나를 잊기 위해 떠난다.

by 한자루




어느 날, 문득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낯선 풍경이 보고 싶어서일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색다른 음식을 맛보고, 일상과는 다른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솔직해지면, 우리는 나를 잊기 위해 떠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딸, 아들, 부모, 친구, 동료, 혹은 한 직장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그 이름들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갑니다.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이름들 아래 가려진 ‘나 자신’은 희미해집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순간에 가장 행복한지, 어떤 풍경을 보면 가슴이 뛰고,
어떤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나는지조차 잊은 채, 우리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떠납니다.
누군가의 기대도, 나를 둘러싼 관계도 없는 곳으로. 낯선 길을 걷고, 모르는 언어가 들리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도착하면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무엇’이 아닙니다.
그저 한 명의 여행자가 될 뿐이죠.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여행을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고,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하지만 여행은 꼭 해외여야 할까요? 반드시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의미가 있을까요?

여행의 본질은 거리가 아니라, 시선에 있습니다.
가까운 바닷가에서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집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여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시선으로 그곳을 바라보느냐입니다.

익숙한 곳이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어제의 공간이 아닙니다.


여행은 여럿이 함께해야 더 즐겁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혼자 떠나는 여행이 더 깊은 감동을 남기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속도를 맞추고, 함께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도 물론 멋진 경험이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조금 다른 종류의 자유를 줍니다.

혼자 떠나면, 우리는 오직 자신의 속도대로 걸을 수 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멈출지, 어디서 밥을 먹을지,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아무런 제약 없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일 때 우리는 더 깊이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늘 누군가와 함께하고, 여러 역할을 수행하느라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지만, 여행을 떠나면, 특히 혼자 떠나면, 우리는 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스스로와 조용히 마주하게 됩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길을 잃어도 괜찮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해진 곳이 없으니까요.

조용한 골목을 걸으며, 차분하게 내려앉은 햇살을 맞으며, 우리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 순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늘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어떤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어떤 풍경이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지, 어떤 순간에 나는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지를.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건, 멋진 관광지도, 유명한 명소도 아닌,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한 짧은 순간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떠나면서 나를 잊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여행은 나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만들어진 내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내가 아니라, 그저 ‘나’라는 이유만으로 존재하는 나 자신을요.

낯선 거리에서 혼자 걷는 동안, 해변의 벤치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우리 안의 감정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바라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내 안의 작은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여행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떠남이란 결국, 나를 잊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젠가 또다시 떠날 것입니다.
어떤 풍경이 우리를 부르든, 어떤 길이 우리를 기다리든.

그곳이 해외든, 가까운 작은 마을이든, 여러 명이 함께하는 여행이든, 오직 나 혼자만의 여행이든.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행이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고,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경험이니까요.


그러니, 다시 떠나야 합니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나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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