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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Apr 19. 2024

#2. 첫 만남 - 노란 아오자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한들 개인적인 연애담이 다른 이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시한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월남댁과 함께한 시간들을 묻어두기엔 너무 소중하다.


나에게 그녀와의 만남은 기쁨, 슬픔, 그리고 의심과 분노로 점철된 그 무엇이었다.

나는 그 기억들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녀와의 과거는 시간의 흔적을 따라 흑백으로 변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모든 것이 알록달록한 컬러로 남아 있다.


월남댁과 나,

우리 둘 모두는 삶에 대해 서툴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빠 나 두달 후에 타이베이로 가요.'
'얼마나 오래갈 건데?'
'한 2년 정도요.'
'오빠는 내가 보고 싶을까요?'
'그래. 아마도...'
.....
'나는 오빠가 누구를 만나든 행복하면 좋겠어요.'


그렇다.

이 이야기는 먼 타국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폭풍 같은 격정의 과정을 거쳐 인생을 동행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지구 중심까지 끌어당길 것 같은 무거운 중력을 감내해야 하는

사랑에 대한 안내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국적, 나이, 성별, 문화, 종교까지 다른 한 여자를 이해하는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이유라면 수 없이 많다.

그중 하나는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서, 혹은 잊기 위해서다.

나는 이 글들을 통해 나에게 아팠던 기억들은 잊고, 좋았던 추억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누군가는 아픈 기억도 소중한 것이라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 아름다운 기억만 남기를 바란다.  

그게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할지라도.



1장. 만남            


오랜 연애는 나에게 어느 정도 진통제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아픔은, 미안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직장생활은 정신없이 바빴다.

베트남은 주 6일 근무였고, 주 4일 야근을 하던 나에겐 이별의 아픔을 곱씹을 만큼의 육체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다행히 그녀 역시 굳세게 나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을 툭툭 털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페이스북은 소개받았다던 남자와의 결혼 준비 소식으로 북적거렸고,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로

시끌벅적했다.


나 역시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요일만은 예외였다.

할 일 없이 빈둥대며, 낮잠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딪쳤다.

텅 빈 일요일을 채우기 위해 당장 무엇이라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베트남어였다.

어차피 베트남에서 살아남으려면 언어가 필수인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와 계약되어 있는 인근 어학당 원장님께 과외 선생님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약간의 허세가 어깨뽕이나 키높이 신발처럼 기본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는 그 원장님은 예쁘고,

한국어도 잘하는 선생님이 있다며 호들갑스럽게 한 선생님을 소개했다.

수업은 한 시간 반 정도에 20만 동(한화로 약 1만 원)이라고 했다.

이 정도 수업료면 완전 공짜나 마찬가지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20만 동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베트남 대졸 신입 직원의 급여가 600만 동(한화 약 30만 원)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개인적으로 부담스러울 만큼의 금액은 아니었기에 군말 없이 공부를 시작했다.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수업은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일요일 한낮의 카페는 한산했다.

어학당 원장님에게 선생님 연락처를 받아 두었지만 카페에서 선생님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노란 *아오자이에 당시로는 보기 드문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나의 등장에 천천히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젊고, 아담했다.

눈썹은 소복했고, 이마는 희고 깔끔했다.

가냘픈 목선을 따라 푸른 정맥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있었고, 콧등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애처로워 보이는 몸매 위로 아오자이로 인해 도드라진 봉긋한 가슴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한 그녀의 까만 단발머리는 초목에서 자란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아오자이가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와 처음 만났다.


"안녕하세요? 베트남어 가르쳐주실 선생님이시죠?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는 원장님이 소개한 선생님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름을 물었다.


"성함이요? 그게 뭐죠?"

아마도 성함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던지 그녀는 나에게 되물었다.


"이름 말입니다. 선생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도 가능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름이요? 저는 응우엔 투 호아입니다."


나름 베트남에 오기 전에 기본적인 베트남어를 공부했던 터라 아는 척을 해보았다.

"호아는 꽃이라는 뜻이죠?"

"네 맞아요."

첫 만남으로 긴장했던 그녀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비쳤다.


"한국에서는 꽃을 화(花)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미스터 정입니다."

"아. 미스터 중이요?"

"아니요. 정입니다."

"네, 미스터 종선생님."


내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웠던지 그녀는 나를 종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억지로 발음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냥 편한 대로 부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때는 '미스터 종'이라고 명명된 나의 이름이 나를 그녀의 종으로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카페에서 만나 공부했다.

석 달 정도의 시간을 지났을 무렵

수업을 마치고 나는 그녀와 점심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식사하던 중에 그녀가 갑자기 나를 '종 선생님' 대신 '오빠'라고 부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오빠, 돈 얼마나 있어요?"

"음... 100만 동(한화 5만 원 정도) 정도 있는 것 같아요."

"아니요, 돈 얼마나 모으셨냐고요? 지금까지"


'... 뭐지?'

그 질문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폐부 깊숙이 날카롭게 박히는 것 같았다.  





* 아오자이


아오자이는 역사적 전환기마다 빠지지 않고 논란을 낳은 의상이다.

전통과 외부의 가치가 갈등했고, 보수와 진보가 부딪쳤다. 그러면서 아오자이는 진화해 왔고, 어느덧 베트남의 상징이 되었다.


15세기 베트남에서는 '아오 뜨 떤(Áo Tứ Thân)'이라는 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아오 뜨 떤'은 타이트하지 않고 허리 부분 밑으로 네 갈래로 갈라진 긴 드레스 형태로, 두 갈래는 벨트 아래의 매듭으로 묶고 바지 없이 치마처럼 입었다. 네 갈래 중 두 갈래는 양측 부모를, 앞으로 매듭을 지은 두 갈래는 남편과 아내를 상징했다고 한다.


1407년부터 1428년까지 중국 명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명 왕조는 베트남 여성들에게도 중국식 바지를 입도록 명령했다. 이게 현재 아오자이의 모체가 된 것이다.


1930년대 하노이의 진보주의 디자이너 응우웬 캇 트엉은 밝은 색상, 몸에 꽉 끼는 품, 양쪽 허리 부분부터 아래까지 갈라진 긴 치맛단, 어깨 부분이 약간 부푼 소매, 물결치듯 주름진 옷단, 허리와 가슴 부분에 솔기가 드러나지 않도록 꿰맨 이음새가 특징인 새로운 아오자이를 선보였다.

그의 아오자이는 베트남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베트남 여성들은 새로운 아오자이에 환호했고 시골에까지 아오자이의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인사들 중에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느 시인은 '시골 사람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벨벳 스카프에, 살랑대는 새틴 바지에 현재적인 아오자이라니!

오, 그대의 모습에 난 불행한 마음입니다.

당신의 엠은 어디에 뒀나요? 지난봄 곱게 물들인 실크 벨트는 어디로 사라졌나요?

당신이 입던 네 갈래 드레스는 또 어디에?


몸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과감한 디자인에, 속이 비치는 얇고 투명한 천으로 만든 아오자이까지 등장하자 이런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오자이는 모든 것을 덮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드러낸다.'


1954년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끝이 났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됐다. 사회주의 세력 하에 북베트남은 아오자이를 부르주아의 의상이며 식민지 잔재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남베트남 여성들은 여전히 아오자이를 즐겨 입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의 경제생활이 나아지면서 유니폼 및 교복으로 아오자이를 채택한 국영기업과 여자고등학교들이 늘어났다.

흰색 '아오자이(áo dài)'는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여성의 조심성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학생들의 교복으로 채택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폐지하는 학교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여학생의 교복으로 하얀 아오자이를 선택하는 학교도 적지 않다.


아오자이에는 기나긴 중국의 지배와 프랑스 식민 시절을 겪은 나라,

하지만 끝내 독립을 이루었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이겨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담겨있다.

외침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도 그들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오자이는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선진 문화를 자신들의 것으로 융합하는 유연성으로 베트남의 상징이 되었다.


아오자이는 외국 여성들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아오자이는 어깨가 좁고 마른 몸매의 베트남 여성에게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오자이를 두고 이렇게도 말한다.


"아름다운 의상. 하지만 모든 여성이 입을 수는 없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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