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성해!” “자세가 안 나와!” 내가 무언가를 할 때 - 특히, 몸으로 하는 어떤 일- 자주 듣는 말이다. 아버지 농사일을 도와줄 때도 그랬다. 낫을 잡거나 제초제를 뿌릴 때, 아버지 눈에는 내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 아버지는 재차 시범을 보여주신다. 나는 따라 한다고 하지만 뭔가 다르다. 군대에서 제식 훈련을 하거나, 모포 정리를 할 때도 그랬다. 나는 아무리 해도 각이 나오지 않았다. 선임이 되자 후배들이 보기에 답답했는지 모포 각을 잡아주었다.
오늘 아파트 1,110세대 단지 내 전단지 광고를 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라인별로 1층과 지하 주차장 각 두 곳 씩 전단지를 붙일 수 있는 '유료광고'판이 있다. 전단지 도안을 만들고 A4용지 100부와 스카치테이프를 준비했다. 전단지를 광고판에 끼우고 모서리에 테이프를 붙여서 고정할 계획이다.
2시간 내 빠짐없이 전단지를 붙이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아파트 단지는 동 호수 표시가 잘 되어있으니 1동 1,2호 라인에서 22동 6,7동 라인까지 돌면 된다. 각 동의 배치는 남북으로 지그재그로 정렬되어 있어 동선도 간결하다. 마치 골프장 라운딩을 할 때, 한 홀을 마치고 다음 홀로 이동하는 것처럼 움직이면 된다. 단지 배치도도 필요 없었다.
전단지를 출력해서 관리사무소에 방문했다. 직원분이 필요한 수량만큼만 도장을 찍어서 돌려주셨다. 1층에서 바로 아래층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붙이면 된다고 팁을 주셨다. '그러면, 먼저 1층 공동현관으로 입장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지하주차장에서 옆 라인으로 이동, 지하층 공동현관으로 들어가서 1층으로 나오면 되겠다' 이렇게 동선계획을 짰다.
'전단지 광고 붙이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어느 동 어느 라인까지 작업을 했는지만 잘 기억하면 되었다. 오랜만에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허벅지에 알이 배겼다. 관리사무소에 카드키를 반납하면서 물었다. “다 붙였는데요… 전단지 몇 장이 남으면 되나요?” “제가 드린 것에서 한 장만 남으면 돼요” “어… 4장이 남았네요. 3개를 안 붙였네…”
어디 라인을 빼먹었을 까? 당연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 중간 어느 지점에서인가 ‘딴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에 몰두하면서 가다가, 내 머릿속 <작업공간>에 잠시 두었던 현재 위치의 기억을 놓쳐 버렸다. 이제 와서 모든 동, 라인을 확인해서 빠진 곳을 채울 수 없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아파트 단지 전단지 돌리기’ 작업을 하면서 예전 생각이 났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여름방학인가. 나는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이 모여있는 한 구역을 맡았다. 대략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 ‘신문보급소’에 가면 사장님과 사모님께서 신문마다 광고전단지를 끼우는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일일이 신문별로 비닐을 씌어야 했다. 이런 날은 사장님 내외분은 4시 전부터 작업을 하고 계셨다)
첫날은 신문 200 여부를 사장님과 내가 나누어 들고 걸어서 길을 익혔다. 사장님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신문을 돌리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첫날은 새벽부터 땀에 흠뻑 젖었다. 각 골목마다 순서가 있었다. 왼쪽 두 번째 집, 오른쪽 세 번째 다섯 번째 대문. 이런 식으로 ‘신문 구독하는 집’을 찍어주셨다. 일간지가 아닌 경제지를 보는 집의 위치는 따로 외웠다. 어떤 대문에는 신문을 넣는 바구니가 있어서 구별이 쉬웠지만, 아무 표시가 없는 집도 있었다. 신문을 넣는 위치는 보통 대문 아래를 통해 안쪽으로 밀어 넣었는데, 어떤 집은 개를 키우기 때문에 꼭 별도의 신문함에다 넣어야 했다.
일주일 정도 되었을 무렵, 골목길이 점차 익숙해지고 신문을 빼고 꽃아 넣는 동작이 능숙해졌다. 첫 주에는 6시 이후까지 마무리를 짓지 못해서 아침에 출근하는 분께 직접 신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제는 자전거를 타면서 신문을 던져 대문 아래로 밀어 넣기도 가능했다. 드디어 내 머릿속에 ‘신문 배달 지도’가 생겼다. 이 구역의 골목마다 신문 넣을 대문들이 선명히 그려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 지도에 오류가 있음이 밝혀졌다. 서너 집에 신문이 배달되지 않아서 연락이 왔다. 며칠간 사장님은 내가 퇴근한 뒤에 따로 빠진 집에 배달을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대문의 모양과 색깔이 비슷해서 어느 순간 잘못된 집에 신문을 넣었던 것이었다. 약 200부 중 4부가 배달사고가 났으니 약 2%가 부족했다. 마음속 ‘신문 배달 지도’를 다시 수정해야 했다. 나는 빼먹은 집을 꼭 기억하기 위해서 그 집 대문에 나만이 아는 ‘도형 표식’을 했다.
오늘 아파트 전단지를 돌리면서, 택배 기사분들이 ‘엘리베이터 문에 써둔 표식’에 관심이 갔다. 각 동마다 1,2,3 / 4,5 호실의 방향과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저 표시 덕분에 기사님들은 지금 어는 동, 어느 라인에 있는 지를 잊지 않겠구나. ‘호실의 방향을 헛갈리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택배 기사님들은 실수를 줄이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모든 동의 엘베에 이런 표식을 해두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택배가 엉뚱한 곳에 배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택배에 연락처가 없으니 택배 주인을 찾으려면 ‘입주민 카페’에 글을 올려야 한다. ‘택배 오배송 알림 게시판’을 만들면 어떨까?’ 택배기사님의 2% 실수를 우리가 채워주자.
살면서 많은 분들이 나의 2% 부족한 부분을 아무 말 없이 채워주셨다. 사실 그분들 덕분에 내가 더 성장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