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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May 03. 2023

낭비는 나의 힘

노동절 연휴 산둥성 지난(제남 济南)을 가다


그는 목마름을 없애 주는 알약을 파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한 알씩 삼키면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다는 알약이었다.
"왜 이걸 팔아?"
어린 왕자가 물었다.
"이건 시간을 절약해 주는 알약이야. 전문가들이 계산해 봤는데 일주일에 오십삼 분씩 절약할 수 있대."
"그 오십삼 분을 가지곤 뭘 하지?"
"하고 싶은 걸 하지......"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나라면 오십삼 분 동안 천천히 우물가로 걸어갈 텐데.'



노동절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게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5일의 시간이 있다면 뭘 하지?



우선은 창 밖 풍경을 끝도 없이 볼 수 있는, 비행기나 침대기차 아닌 '낮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암막 커튼을 단단히 치고 침대에 누워있고 싶은 만큼 누워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행지에서의 오전을 낭비할 것이다.


'다 같이 누워있자'라고 말하는 듯한 천불산(千弗山)와불


그러다 눈을 뜨면, 침대에 누운 채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에게 과감히(!) 전화할 것이다.  역시 아직 침대에 머물고 있는 중이라면 더없이 기쁘겠지. 아침 건너뛰고 기분 좋은 공복을 즐기다 자연스럽게 마려워진 똥을 부드럽게 배출하고, 브런치를 먹으러 어슬렁어슬렁 가볼 것이다.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낯선 도시를 성글게 구경할 것이다. 그러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가방이 무겁거나 갑자기 변덕이라도 일면, 언제든 그만두고 호텔방에 돌아와 낮잠을 잘 것이다. 그렇게 여행지에서의 오후도 낭비할 것이다.


페달을 천천히 밟는다.


현지인들은 무심히 지나치는, 길가의 꽃한참 들여다보고 코를 들이밀 향기도 맡아볼 것이다.



생뚱맞은 길가 풍경에 웃음 터지겠지.


아시아 최대(?) 고추 판촉물, 대체 얼마나 맵길래!
개구리 팔이 소녀

 

'필수', '대표' '유명', '打卡地', '입장료' 등이  붙은 곳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본전은 뽑아야지', '언제 다시 와보겠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천불산, 사람에 밀려 산길을 올라가기조차 어려웠다.
중국 3대 성당건축물 홍가루성당(洪家楼教堂), 굳게 잠겨 있었다.
대명호(大明湖)가는 길, 인산인해


 '맛집'이라는 곳을 굳이 찾아다니지 않고 허름한 주택가 모퉁이, 현지인들이 즐겨가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그 집 메뉴판의 첫 번째 메뉴를 주문할 것이다.


제남의 대표 음식 바자육(把子肉), 저렇게 골랐더니 23.5元(약 4,500원), 어마어마한 맛이었다!


일정 따윈 없이,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고, 마음속에 담아 가고 싶은 곳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가 볼 것이다. 그 시간 그 곳에 내 몸과 마음이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를 깊이 음미할 것이다.


소박한 연못 풍경, 오룡담(五龙潭)공원
나무 그늘 아래 잠든 사람들, 오룡담 공원
바람에 왈츠 추는 버드나무들, 백화(百花)공원


그렇게, 10시간 동안 고속철을 타고 지난으로 왔다.  밖 풍경을 보다가 졸다가를 반복했다. 옆자리에는 계속 과자를 먹어대는 뚱뚱한 젊은 남자가 앉았는데 내 좌석의 20%를 추가로 차지하는 바람에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연휴기간이라 호텔 가격 올랐을뿐더러 저렴한 호텔은 벌써 다 매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생애 가장 비싼 호텔에 머물렀다. 4일간의 숙박비가 지금 살고 있는 연길 집의 한 달 치 방세보다 더 비쌌다. 오로지 나 한 사람만을 위한 방인데 그런 낭비가 없었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침실 외에 거실 있, 수영장도 맘껏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직장에서 이기적이고 각박하 구는 일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 일도,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한 바퀴 돌려 생각하는 일도, 아이들이나 남편의 걱정을 대신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어설픈 작전을 짜는 일에도 너무 지쳤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낭비하고 싶었다.


시간낭비, 돈 낭비, 감정 낭비... 늘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려고 전전긍긍하지만 결국은, 매 순간 정확한 직선으로, 99.9% 효율적으로 살지 못한다. 기계가 아니기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낭비고 만다.


대명호 풍경


샘물의 도시(泉城) 지난. 물이 풍부하니 꽃과 나무가 많고 꽃과 나무가 많으니 공기가 상쾌하고 어딜 가든 새소리가 들리고 은은한 꽃 향기가 풍겼다.


이곳에서 꽃과 나무, 호수와 연못 실컷 보았다. 맑은 바람도 실컷 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길도 맘껏 걸었다. 아침 7시와 밤 10시, 사람이 없는 시간, 수영장 전체를 다 차지하고 개구리처럼 유쾌발랄하게 수영도 했다.



그렇게, 지난에서 5일을 보내고 다시 10시간 고속철을 타고 연길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예쁜 꼬마 아가씨가 옆자리앉았는데 그렇게 널직하고 편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인생길은 가봐야 안다. 앞장은 다소 실망스러웠더라도 다음 장에는 어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뒤틀리고 갈라졌던 맘 속에 어느새 샘물이 촉촉이 스며들었다. 때로는 낭비가 휴식이자 놀이고, 성찰이 된다. 다시 용기 내어 살아가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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