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몇 살이에요?”
올해 고등학교에 가는 손녀가 물었다.
“음, 할머니는 누가 나이를 물으면 얼른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어. 그런데 네 나이는 잘 알거든. 그래서 네 나이에 60을 보태면 되더라.”
그랬더니 손녀는 내 머리를 제 가슴에 꼭 안고 머리를 숙인 채 한참을 정지된 것처럼 있었다.
‘아, 이 아이가 늙음 다음에 어김없이 오는 죽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구나.’
어렸을 때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나한테 허락받고 죽어야 돼. 자 약속하는 거지?”하고 손가락을 걸었었다.
“왜? 할머니의 나이가 너무 많아?”
“응.”하며 울먹인다.
“걱정 마. 할머니는 우리 아이린이 대학 가고, 결혼하고, 또 아기도 낳고 하는 것을 다 볼 거야.”
“당연하지.” 아이는 할머니의 말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씁쓸한 웃음을 주었다.
그날 밤 손녀는 내 손을 꼭 잡고 곁에서 잤다.
이 지구 상에 인류가 출현 한 이래 원시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냥 버렸다. 그러다가 날이 추워지면 메마르고 죽어가던 나무나 풀들이 따뜻한 봄이 오니 땅 속에서 파릇하게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어쩌면 사람도 죽은 후 땅 속에 묻어두면 봄에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라는 희망을 갖게 되어 매장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이러한 기대는 미라를 만들고 또, 과학이 발전한 현대에 와서도 저버리지 못하여 시신을 냉동 보관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이 냉동인간이 소생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궁금해진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사회적 혼돈을 야기할 것이고,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괴물과 같아질 것 같다.
인간에게 창조신이 공평하게 부여한 것이라면 '탄생'과 ‘죽음’이다.
그러나 탄생의 기쁨과 상반된 죽음에는 인간으로서 겪는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이 있다.
그 누가 웃으며 보내고 웃으며 떠날 수 있으랴.
천상이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답다 할지라도.
잠시라면 잠시 머문 이 아름다운 세상에 나는 무엇을 보태어 놓고 민들레 홀씨처럼 홀홀히 떠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