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한 가지가, 어떤 계획을 했을 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기 보다 성공, 실패의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잘 될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매사에 이렇게 할 수는 없고, 가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이야기다.
프로젝트를 하면 이슈 미팅을 할 때가 있다. 이때 대게 방안 A, B를 정해두고 사람들이 오랜 논의 끝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이슈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방안을 정하는데 하세월, 이 방안들 중 한 가지를 결정하는데 또 하세월이다. 너무 많은 고려 사항을 생각하고 어떤 결정을 했을 때 책임 문제가 있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제거리인데,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다 보니 가래로 막을 걸 호미로 막게 생겼다.
이때 나의 주장은 어차피 A 방안과 B 방안의 효과성은 49:51로 큰 차이가 없으니, 어떤 방법으로 처리할 것인가로 이리 오래 시간을 소모하느니 좀 더 빠른 결정을 하고 이 결정에 따르는 추가적인 리스크에 대해 대응 방안을 더 추가해서 일단 발로 뛰자는 주의다. 즉 A 방안을 선택해서 시행을 하되, A 방안을 골랐을 때 우려사항에 대해 추가로 더 고민해서 방안을 섬세하게 보완해서 진행하자는 의미다.
그래서 나 같은 유형은, 이슈 해결 방안에 대한 의사결정 자체가 늦어질 조짐이 보이면, 이슈 그 자체보다 '늦은 의사결정'을 더 화두에 올린다.
일할 때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 나름 중요한 계획이나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자체에 대해 전전긍긍하느니 일단 '방향성을 결정'하고 이를 '어떻게 할까'에 더 집중한다. 즉 '실천'이나 '행동'에 더 비중을 둔다.
예를 들자면,
션을 제주에 보내기로 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과연 잘한 선택일까"이다.
그러다 이내 생각을 바꿨다. "3년이나 6년 후, 여기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괜히 제주에 보냈다'라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잘 살아보자."였다.
물론 중간중간 나의 선택에 대해 회의가 든 적은 있었으나 그래도 긴 호흡을 가지고 션을 지켜보았다. 몇 가지 단기 계획을 션과 이야기를 했고, 션이 자라면서 서서히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더 이상 엄마의 조언은 필요 없고 격려만 해도 되는 시점이 되자, '우리가 잘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션을 제주에 보냈을 때는 "아니 왜? 왜 멀쩡한 아이를 제주로 보내?" 소리를 들었다.
요즘은 "그때 션을 제주에 보낸 건 참 잘한 선택이었어."라는 말을 듣곤 한다. 입시 결과를 보고 하는 말이다.
가끔 션의 서울 친구들 중 "자기도 제주에 갔으면 좋았을걸", "엄마는 왜 나는 안 보냈어?"라고 말하는 경우도 생겼다.
만약 션의 입시 결과가 기대 이하였다면 "그것 봐, 그냥 데리고 있지 그랬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결과'를 두고 선택을 잘했다, 못했다를 평가하다 보니, 사람들이 매번 어떤 선택을 할 때 '잘한 선택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데도 말이다.
션의 6년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이 왔었다.
그중 미리 결과를 알고 잘 한 '선택'은 없었다.
션과 나 모두 그 선택이 '후회'가 없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더 궁리하고 행동에 옮겼을 뿐이다. (좌절도 꽤 있었지만)
어떤 목표가 있을 때 '우려되는 바'를 100가지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는 방법'을 100가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걱정거리 때문에 시작하는 것부터 어려워하고 시작하고 나서도 첫 시련이 오면 '역시 내 예상대로잖아.' 하고 포기를 한다. 반면 후자는 시련이 오면 또다시 '되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실천에 옮겨서 결국 해 낸다.
될까, 안될까
과연 할 수 있을까
나중에 후회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 할 시간에 '되는 방법'을 더 찾아보고 실천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