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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나 Sep 29. 2024

너와 나 우리의 '학습둥지 프로젝트'(8)

빌런들이 떠난 자리에 채워지는 고민들

처음 시작해 본 영어캠프는 엉망이든 절망이든 희망이든 그렇게 막을 내렸다.


2월이 시작되고 추운 겨울 한가운데에 원년 멤버 다섯과 엄마들은 여전히 품앗이 활동을 하며 다누리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내 아들이든 다른 엄마네 아들이든 여전히 떠들고 산만한 것은 한 치의 나아짐이 없었으며 영어원서책을 받고 알파벳 프린트물을 매 시간 받는다 해도 본인 이름 석자만 덩그러니 적고선 일회용 교재 일회용 프린터물 마냥 휘리릭 던져두기 일쑤였다.

추운 날씨 때문인 걸까? 기세등등하던 나와 아이들의 첫 기세는 한풀 두풀 세풀은 꺾인 모양새였는데 수업이란 미명 하에 눈 맑은 빌런들은 삼삼오오 모여 별 것도 아닌 이야기로 히죽히죽거리거나 깨끗한 교재에 낙서하느라 매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다누리 도서관이 올누림으로 이전하기 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두 어달. 

그 사이 이 수업이 정리되고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수업을 벌려놓은 당사자인 나로선 다음 장소를 물색해야만 했다. 그런 고민이 쓰윽 올라올 때마다 눈 맑은 빌런들이 헤벌쭉 웃거나 소란을 피울 때면 내가 과연 이 수업을 끌고 가는 게 맞는 것인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다누리도서관에서 꾸려진 클래스는 두 반이었는데 예비 초등학교 1학년 첫 번째 클래스와 5세~6세로 꾸려진 두 번째 클래스.

저녁 7시부터 진행되는 7세 아이들은 꾸준히 나오는 원년 멤버들과 오락가락 한 번씩 오는 아이들이 좀 있어 아주 많진 않아도 적당한 인원수를 유지했다. 그러나 원년 멤버 아이들을 이른 시간으로 배정한 것이 화근이었는지 5세~6세 아이들은 수업 참석율이 많이 저조한 편이었다.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수업이 진행되다 보니 어린아이들은 졸음이 와 칭얼거리거나 힘들고 벅차니 몇 번 오다 말다 하길 반복했다.

결국에 남은 아이라곤 내 딸과 원년멤버 중 정호 여동생 지연이와 지유 성환이 정도였는데 사실 남아서 듣는 아이들 조차 수업을 들으면서도 몰려오는 졸음으로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주어진 두 어달의 시간 동안 현재처럼 두 클래스를 유지할지 아님 두 클래스를 한 클래스로 줄여 모든 연령 아이가 함께 배우면서 운영시간을 7시에서 8시 30분 정도로 조절할지를 고민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입장은 강경하셨다. 아이들의 인지력이 다른데 함께 가르치면 학습효과도 떨어질 테니 본인이 힘들더라도 두 클래스를 유지하시겠다 고집을 부리셨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8시 클래스에 딱 두 명의 아이들이 온 그런 날이 있었다.

그 두 명은 내 딸과 오빠 따라 항상 오던 지연이였다. 지연이는 사실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연이는 예쁜 스티커를 좋아하고 담요 하나를 안고 다니는 아주 예쁘고 귀여운 꼬마 아가씨지만 연필 잡고 이름 석자를 제대로 써보지 않았고 종이 한 장을 제대로 넘기는 법이 없었다. 두 꼬마 아가씨가 엄마의 강요로 클래스에 앉아 선생님과 조촐하게 영어를 배우던 날 선생님께 다시 제안을 드렸다.


"선생님, 4월에 다른 장소로 옮기게 되면 한 클래스로 줄이시죠. 대신에 시간을 1시간 30분으로 늘리고 6세부터 8세까지 함께 배웠음 해요."

선생님은 일단 알겠다 답변을 하셨다.

아마 그날 이후 선생님은 좀 더 고민을 하셨으리라 난 추측한다. 퇴직한 국공립 중•고등학교 과학선생님은 미취학 아이들을 처음으로 제대로 가르쳐 보셨을 것이다. 앉아서 필기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듣기 싫으면 누워서 자는 중고생은 가르쳐봤어도 듣기 싫으면 화장실로 뛰어가고 엄마를 목청 껏 부르며 질주하고 뜬금없이 졸리다 우는 꼬마 상전이자 빌런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으리라. 맑은 눈망울과 배시시 웃어 되며 도대체 다음 행동이 예측 불가인 천사들을 가르쳐 보긴 처음 일 것이며 그 매콤함이 보통이 아님을 느끼셨을 것이다.

도서관 담당자분들도 사실 우릴 반기지 않았다.

빌런들의 악행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다짜고짜 화장실로 달려가니 조용한 독서 공간에서 책을 읽는 어른들의 항의는 당연지사였다.

천사의 얼굴을 한 이 녀석들은 도서관만 오면 마치 사하라 사막을 걷는 기분이 드는 건지 주구장창 정수기 앞에 머물고 있었으며 수업 중에 뭐가 그리 재미난 것들이 생각나는 건지 도서관 공간 사이를 누비며 술래잡기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게 까지 흘려가다 보니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도 수업을 꾸려가는 나도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바꾸어야 할 것은 바꾸어야 하는 선택에 순간에 이른 것이다.

선생님은 예측불가 빌런들의 구미에 맞는 수업지도 방식과 잠시라도 궁둥이가 책상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게 할 무언가를 마련해야 했고 난 두 달 뒤 과연 우리가 안정된 장소로 이 아이들과 함께 제대로 이동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동한다면 그곳에서는 정상적인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책은 책이요. 빵은 빵이로다.




처음 공부방을 대여해 준 혜영 씨에게 연락이 왔다.

혜영 씨는 우리 동네에서 몇 안 되는 영어 수학 전문학원을 운영하는 원장님이자 첫 아이가 우리 딸과 동갑이라 같은 어린이집을 다닌 인연이 있어 가끔 차도 마시고 인사도 나누고 재미있는 영어 프로그램이 있으면 정보도 교환하는 동네 아줌마이자 언니 동생하는 하는 사이다. 그런 인연 때문에 아이들에게 처음 공부방을 마련해 주고 수업 진행도 함께 지켜봤으며 도서관에서 진행된 수업에도 감기가 잦은 첫째 딸이 컨디션이 좋다면 항상 데리고 수업을 참여한 몇 안 되는 열혈 엄마 중 한 명이었다. 혜영 씨는 12월 경 나에게 제안 하나를 했었다.

" 언니, 있잖아요 아이들 가르치키로 우리가 마음을 먹었으니까 저도 돕고 싶어요. 확실히 어떤 식으로 딱 준비해서 제가 돕진 못하지만 군에서 '신활력플러스'라는 사업이 있는데 거기에 제안서를 내고 농촌의 활력을 줄만한 아이템으로 선정되면 예산을 받아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솔깃한 제안이었다.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어떤 걸 제안할 생각인데? 구상해 놓은 게 있어?"

"사업제안을 낸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8주 차 동안 멤버를 구성해서 교육을 듣고 아이디어 사업제안서를 낸 뒤에 평가 후 순위에 선정이 되면 실제 운영할 수 있는 지원금이 나온대요. 4명의 멤버를 구성하고 8주 차 교육을 듣고 계획서를 내면 되거든요? 언니야 공무원이라 힘들 테고 멤버만 구성해서 아이들 참여형 영어 프로그램을 제안했음 싶은데 어때요?"

"어떤 프로그램을 해볼 생각이야?"

"몇 가지 생각은 있어요.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숲체험 놀이랑 어린이집 친구들을 대상으로 영어뮤지컬, 그리고 단양어린이집 원장님과 아이디어를 공유 중인데 영어바자회도 해봤음 싶어요."


이런.... 또 판이 커지고 있다. 귀가 열려있는 이상 이런 제안을 들으면 멈출 수가 없다.

"내가 뭘 도와주면 돼?"

"언니.. 우선 저 이외에 3명이 더 있어야 해요. 제가 뉴질랜드에서 오신 영어 선생님 한 분께는 같이 하자고 부탁을 했어요. 만약 그분이 오케이 한다면 두 분이 더 필요해요. 언니의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만약 공모사업이 잘만 진행된다면 시골 귀염둥이 빌런들은 올 해를 넘기기 전에 원어민과 함께하는 숲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생애 처음으로 영어 뮤지컬에 도전해 볼 것이고 어설픈 영어로 물건을 팔아보고 기부를 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수업에 참여하는 빌런들의 수는 줄어드는데 내 머릿속 고민거리는 늘어만 간다.



가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길이 없어지면 숲길과 흙길을 밟고 밟아 길들여 길을 만들어 가면 되겠지.


공모사업이라..... 까짓것 찾아보자 그게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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