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와 다시 시작합니다

by 오드리

오드리가 수지를 만난 것은 로지가 세상을 뜬 지 반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그 기간 동안 월터네 일을 잠깐 했을 뿐 오드리는 쭈욱 집에서 쉬었다. 남편 덕분에 생계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 좀 답답하고 막막하긴 했다. 그래도 조급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활보와 이용인의 관계도 약간의 운명이 개입한다는 생각이 들어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날 때가 되었다는 듯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오드리는 수지가 예비 중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적어도 로지처럼 홀연히 떠날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담당자가 일러준 대로 수지의 엄마 린다가 일하는 편의점을 찾아가다가 오드리는 깜짝 놀랐다. 주소를 듣고 로지네 동네란 건 알았지만 바로 코앞일 줄이야! 심지어 수지가 다닐 중학교 옆 오솔길은 로키와 산책할 때 오드리가 가장 좋아하던 코스였다. 로지가 수지를 소개해준 걸까? 자신이 믿고 있던 약간의 운명론이 더 공고해지는 느낌이었다.


더 신기한 것은 오드리의 변심이었다. 로키와 산책을 다닐 때는 그 학교가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관심도 없었고, 로지네 아파트 외에 다른 집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도 안 들어왔다. 그랬던 것이 린다와 인사를 하고 수지의 손을 잡는 순간부터 오드리의 시야는 수지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러면 로지를 비롯한 전 이용인들 생각을 전혀 안 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특히 그들의 집이나 동네를 지날 때면 습관처럼 생각이 난다.


예를 들면 오드리 집에서 가장 가까이 살았던 시각장애인 톰은 어떻게 해도 잊히지 않는다.

헤어지고 두 번 정도 톰을 보았다. 한 번은 톰이 술에 취해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갈 것이지 또 어딜 쏘다니나 싶어 애가 탔던 기억이 있다. 또 한 번은 모처럼 볕이 따스한 겨울날 동네 노인들과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해를 쬐고 있는 톰을 보았다. 톰은 눈을 감고 한쪽 입매를 찡그린 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오드리는 얼른 그 자리를 지나쳤다. 톰이 자신을 못 볼 텐데도 두려웠다. 그 뒤로는 톰을 본 적이 없다. 집에만 있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톰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결국 어디가 아파서 입원을 했거나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갔거나 어쩌면 죽어서일 수도 있다. 그런 각오는 톰을 알고부터 늘 해오던 것이었다.


수지네 집까지 가려면 지나가 살고 있는 동네도 만난다. 그 전날까지도 별일 없다가 새벽에 '내일부터 오지 마세요'라고 문자 한 줄 달랑 날렸던 지나. 이유라도 듣고 싶었지만 지나는 오드리를 문전박대했다. 하지만 당시의 황당했던 마음도 이제는 사라지고 그저 그녀의 밤이 편안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남은 평생 통증과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는 지나한테 서운함을 가져서 무엇하겠는가.


조금만 더 가면 마녀할멈 헬가네 동네다. 지옥 같은 보름이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추억이다. 그 뒤에 헬가와 잘 지냈던 전 활보쌤을 만나 얘기를 나눈 게 도움이 되었다. 헬가도 몸이 아프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었다는 거다. 하필 헬가 인생 최악의 시기에 오드리와 만났던 것일 뿐. 서로 때가 안 맞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하지만 진짜 솔직하게 본심을 말하라면 헬가는 어떻게 포장을 해도 나쁜 사람이다. 그녀는 활보를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딸 클라라를 감안해 최대한 이해를 해보아도 쉽지가 않다.


로지네 아파트가 보이면 목적지에 다 왔다는 뜻이다. 전 이용인들은 모두 잊고 수지한테 집중할 시간이다. 한동안은 로지네 아파트를 볼 때마다 묵념하듯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시간의 힘은 서서히 오드리의 기억에서 로지를 쫓아냈다. 한 번은 수지와 거기를 지나다가 "예전에 말이야, 이 아파트에 로키라는 강아지가 살았어."라고 말해 놓고 너무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놀랄 정도였다. 수지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오드리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수지가 강아지에는 관심이 없어서 대답을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재가 근무만 했던 오드리에게 수지는 첫 사회활동 이용인이다. 통학, 출퇴근, 외출 등 이용인의 이동을 돕는 것이 사회활동 서비스이다. 그러자면 차가 필수인데, 오드리는 운전면허도 없었다. 그렇기에 수지와 매칭된 사실이 더더욱 예사롭지 않다. 린다는 차를 소유한 몇 명의 활보와 면접도 보고 며칠 일을 시켜보는 등의 시행착오 끝에 최종적으로 오드리를 선택했다. 학교와 집, 학원이 모두 도보로 가능한 거리라 굳이 차가 없어도 되었고, 마침 린다가 수지의 비만을 심각하게 인식하던 참이기도 해서 그런 결정이 가능했다. 린다는 오드리한테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수지와 산책을 많이 해달라고 특별히 청했다.


수지네 중학교에서 특수반 아이들은 전 학년 합쳐 열 명 남짓이다. 수지는 일반 교실과 특수 교실을 오가며 다양한 수업에 참여한다. 오드리는 하교 시간에 맞춰 특수반으로 갔다. 다른 보호자들은 차에서 대기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지는 행동이 느려서 종이 울리고 십 분이나 십오 분쯤 지난 후에 나온다. 그 시간 동안 오드리는 왁자지껄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최대한 몸을 벽 쪽으로 붙여 보지만 교복 일색의 무리에서 오드리의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선생님들도 간간이 지나간다. 처음 며칠은 어색하고 눈치가 보였다.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지를 위해서도 그래야 했다.


오드리는 수지의 가방을 받아 들고 함께 교문으로 걸어간다. 유치원생도 아닌데 가방을 들어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수지가 가방을 주니까 받을 뿐이다. 수지는 중학생이니까 가방은 스스로 메고 가야 돼,라고 가르칠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지 아직 오드리는 알 수 없다. 가방을 들어주는 활보와 하교하는 자신의 모습이 일반 학생들과 다르다는 걸 수지도 아는지, 그것도 아직은 모르겠다. 수지와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오드리는 천천히 수지를 알아가는 중이다.


수지가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학생들의 입장은 알 것도 같다. 활보를 하기 전에는 오드리도 일반 학생들 쪽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별 생각이 없을 것이다. 학교에 특수반이라는 게 있고 보호자들이 들락날락하는 것 같기는 한데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 오드리도 장애 비장애를 떠나 자기와 관련 없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활보가 되고 나서야 장애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저쪽 사람들이 배경처럼 존재한다. 두 세계가 배타적이라는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어우러져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다.


남들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오드리의 마음에 달려있다. 아직은 수지와 친하지 않아도, 설령 수지가 자기를 싫어해도 활보는 이용인을 품어야 한다. 이해한 척 스스로를 속여도 안 되고, 겉으로만 친절한 척해도 안 된다. 하루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지와 함께 하는 동안은 온전히 수지의 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현재 오드리 마음의 일 순위는 수지뿐이다. /



목요일 연재